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헤세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
헤르만 헤세의 책은 어렵다. 작가가 아주 자세히, 깊게, 거의 직접적으로 삶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음을 느끼지만 과연 내가 이해한 것이 작가의 의도가 맞는지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읽고,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생각하고, 곱씹는 것은 그가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삶에 여유가 있어 걱정이나 고민을 만들어내는 질문처럼 보일 수도, 당장 닥친 하루하루의 삶 앞에서 한가한 질문처럼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바쁘고 고된 하루가 끝난 저녁, 또는 큰 환희가 끝난 후 적막이 나를 감쌀 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는가. 어린 날에는 자주 기로에 서서, 나이가 들어서는 자꾸 뒤돌아 보며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나, ‘이렇게 살았던 것이 옳았을까’하고 질문을 던지게 되지 않는가. 그래서 읽고 또 이해해 보려 노력한다. 헤르만헤세의 질문과 작가가 나에게 최선을 다해 전달하고자 했던 진리를, 또는 암시를, 또는 제안을.
중세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수도원 학교의 젊은 교사 나르치스가 아름다운 신입생 골드문트의 본성(내면, 소명)을 알아보며 시작된다. 나르치스로 인해 골드문트는 자신이 나르치스와 같은 수도사의 길(이성, 금욕, 사상, 정신의 길)이 아닌 예술가의 길(감각, 자유, 사랑, 감정의 길)로 가야할 사람임을 알게 되고 수도원을 떠나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며 살다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골드문트는 방랑의 길에서 수많은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쾌락을 즐기고,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자신을 위협한 이와 여인을 강간하려던 자를 죽인다. 페스트가 휩쓸고 간 마을에서 죽음과 인간의 비이성적인 학살(유대인에 대한)을 목격한다. 이러한 자유와 쾌락, 자기만의 길이 요구하는 굶주림과 추위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사유와 이성만으로 얻을 수 없고 표현될 수 없는 예술(나르치스를 모델로 한 사도 요한의 조각상)을 실현해 낸다. 방랑이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고난(육체적 쇠약, 병)으로 끝내 만들고자 소망했던 어머니의 조각을 시작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만(죽음의 부름을 받지만) 그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눈을 감는다.
메시지가 분명한 책들이 있다. 인물 사이의 관계와 대상에 대한 묘사와, 사건과 그 사건의 결말, 서술자가 그 사건에 대해 보이는 태도 등을 통해 우리는 주제를 짐작한다. 조금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대화의 방식이 있고, 특히 서로 다른 두 생각을 논쟁으로 펼쳐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책은 메시지가 덜 분명하고 어쩌면 그저 이 책의 메시지는 그저 ‘생각해 보라’는 것이 전부이지 않았을까, 하는 경우도 있다. 독자는 작가의 메시지와 무관하게 책을 받아들이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앞서서 원래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원래 하고자 했던 작가의 메시지(주제)에 대해 파악해야 이후 그 메시지를 수용하든 비판하든 하는 과정에서 그 책은 내 세계관에 훨씬 더 많이 기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헤르만헤세의 책 중에서는 어쩌면 더 친절한 책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마저도 나는 오래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작가의 메시지를 옳게 해석했는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의 추측만으로 해석하지 않기 위해 구절구절, 특히 골드문트의 생각을 여러번 읽었을 뿐이다.
하나, ‘나 자신의 삶’을 살라.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수도원에 온 골드문트는 선생 나르치스를 보며 그와 같은 삶(수도자)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와 자신의 길은 다르다고 말하고 골드문트는 그에 대해 화를 낸다.
“...(전략)... 예를 들면 어째서 당신의 소명은 나와 다른 거지? ... 우리의 소명 역시 같아. 바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
나르치스는 말한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우리의 과제는 서로 가까워지는 게 아니다. 태양과 달 혹은 바다와 육지가 서로 가까워지지 않듯. 사랑하는 친구여, 우리 둘은 태양과 달이고 바다와 육지야. 우리의 목표는 하나로 섞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고, 상대방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걸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서로 반대되면서도 보완된다는 걸 말이지.”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도 잊고 있던 어머니의 존재(어린 시절 방랑의 길로 떠나 버려 기억에 지워졌던 존재로, 골드문트와 같은 본성을 지님)를 일깨워주고 머지않아 자신의 삶이 아버지의 세계(금욕과 이성)가 아닌 어머니의 세계(감각과 자유)에 있음을 깨달은 골드문트는 결국 ‘나르치스가 안내할 수 없는 땅, 자신이 홀로 길을 찾아야 하는 땅’에 들어선다.
그리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와도 다르고 대다수의 정착민들과도 다른 삶을 살아간다. ‘데미안’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알에서 깨어나’오기를 일깨웠듯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역시 골드문트는 이제까지 살아왔던 의존적인, 타인과 비슷한, 아버지가 주입한 세계에서 나아가 ‘자기만의 삶’으로 나아가면서 비로소 독립적인, 자신의 본성에 맞는, 자신의 본성으로만 실현할 수 있는 세계(예술)을 실현해 낸다.
헤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나 자신의 삶’을 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소명’이라는 것, 우리는 그 ‘본질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둘, 삶은 이중성 위에, 그 모순의 조화를 이루는 것
그러나 골드문트의 삶은 완전하지 않다. 자기를 실현하는 삶, 나르치스에 의하면 ‘하늘이 내린 재능으로 가장 의미 있는 것을 창조해내는’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골드문트과 쾌락과 감각을 좇느라 일반적인 도덕 관념(동시에 여러 여성과의 쾌락을 즐기려 하거나 남편이 있는 여자와 관계를 맺는 일 등)을 뛰어 넘는 일을 논외로 하더라도 골드문트는 회의한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는 완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가? 어째서 그의 최근의 행복이나 나르치스의 미덕과 지혜 속으로 이따금 이런 기이한 고통이, 이 조용한 불안이, 덧없음에 대한 이런 비탄이 섞여든단 말인가? 자신이 사색가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는데 어쩌자고 이토록 골똘히 생각에 잠겨야 하는가?
그의 이러한 회의는 방랑 생활의 초기뿐만 아니라 중, 후반으로 넘어가면서도 계속 된다.
방랑생활의 천진함, 그것이 어머니 쪽에서 왔다는 것, 그런 생활이 법과 정신에 등을 돌리고, 그저 자신을 내맡겨놓은 채 죽음과 은밀히 가까이 지내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골드문트의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내면에 정신과 의지가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그가 예술가라는 사실이 삶을 풍성하게 하면서도 힘들게 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생각이 바로 ‘예술에 대한 생각’이다. 자유와 쾌락, 감각의 상징인 골드문트마저도 그의 삶과 그의 본성이 가능하게 한 영감, 그리고 그 영감으로 가능한 예술품, 그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의 삶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본성과 아주 모순된 관계에 놓인다.
골드문트의 감각 추구, 이러한 삶을 통해 얻은 삶의 진리(이렇게 표현해도 될까? 행복과 고통이 하나라는 깨달음, 죽음과 삶이 하나라는 깨달음 등 골드문트가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두려움과 굶주림을 감수하며 자기 실현을 하며 직시하게 된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모습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까?)를 이제 조각으로 창조해내고자 한다. 그런데 이 조각품, 자기 실현의 결과로, 나르치스의 표현대로라면 하늘이 내린 재능, 자기 본성에 맞는 길을 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창조물은 아이러니하게도 골드문트의 ‘본성’을 포기할 때 얻어진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골드문트는 생각한다.
인간이 얼마나 굴욕스럽게 삶의 노리개가 되는지, 웃음이 터지고 눈물이 날 일이다! 인간은 살면서 감각들이 놀이하게 하고 오래된 에바-어머니의 품에 매달려 실컷 젖을 빨 수 있다-그러면 많은 쾌락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덧없음에는 맞설 방책이 없다. 숲에서 피어난 버섯처럼 오늘은 아름다운 색깔을 뽐내지만 내일이면 그대로 썩어버린다. 또는 인간은 덧없음에 저항해 스스로를 작업장에 가두고 순간적인 삶에 기념비를세우려 할 수도 있다. 그 경우 자신의 삶은 포기하고 한낱 도구가 되어 불멸의 것을 위해 봉사하지만, 스스로는 말라버리면서 자유, 충만함, 삶의 쾌락을 잃어버린다. 니클라우스 스승도 그랬다.
나르치스는 이성과 사유와 금욕의 편에 골드문트는 감각과 자유, 쾌락의 편에 있다. 헤세는 골드문트에게, 그리고 인간에게 ‘기꺼이’ 자기를 실현할 것을 권한다. 그 감각과 쾌락의 삶에 어떤 것들이 주어지는지 –굶주림과 불안, 두려움, 타락의 가능성-를 솔직히 말하면서도, 심지어 그 삶이 완전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자기를 실현하라고 한다. 그 자기 실현의 끝에는 자신의 본성을 억눌러야만 하는 시점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심지어 감각의 화신인 골드문트가 작품 후반에 그랬든 기질이 변하고 심지어 제자에게 ‘책임’을 느껴 버린다는 것까지 통찰하고서도 권한다.
인간의 삶은 모순 위에 놓여 있다. (물론 그 모순 위에 나르치스와 같은 사색가의 삶도 있다.) 조화를 좇고, 자기를 실현하여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창조해 내라, 그리고 그 각각의 삶을 존중하라, 그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초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일이다.
이것이 내가 읽은 헤르만 헤세의 메시지이다. 이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