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2

‘나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하여

by 쉼표

헤르만 헤세는 ‘나 자신의 삶’, ‘규범과 세계에 저항하는 삶’이 필요함을 왜 이렇게 강조했을까? 헤르만 헤세는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처럼 신학자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로 신학교를 다니다가 결국 중퇴하고 만다. 주인공 한스는 죽었지만 다행히도 헤르만 헤세는 살아 남았다. 그때 그는 느꼈을 것이다. 자신은 신학자가 될 수 없고,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며 소명인 것을. 그리고 그가 자신의 본성대로 산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안다.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할 때,


헤르만 헤세와 같이 대단하게 소명을 성취해 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할 때 불행하다. 아이들은 각자의 개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획일적인 교육을 얼마나 강요받고 있는가? 결국 그 안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음에도 우리는 같은 길을 향해 달려간다.

학업을 하는 학생들의 얘기, 인생의 기로에 선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의 규범을 정해 두고 거기에서 어긋나는 사람을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얼마나 비난하는가?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오직 자신이 감수하는 위험과 불안에 대해서도 '현실성이 없다’거나 ‘철이 덜 들었다’며 단정짓지는 않았는가?




자아를 찾는 일과 도덕성의 문제


그러나 한편으로 ‘나 자신의 삶의 길’을 가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삶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성을 발현하고 그로 인해 가치 있는 일을 함으로써 후회 없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각자가 가진 것을 억눌렀을 때, 그래서 재능을 꽃 피울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삶이 도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본성의 발현이 재능과 가치 있는 무언가로 이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설령 그 본성이 발현이 재능과 가치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감수해야 할 불안과 두려움과 위험을 감당하는 것이 개인에게 큰 불행일 수도 있다. 그 감당의 몫이 사회일 때에 이 논쟁은 더 치열해진다.


- 자아를 찾는 일은 도덕을 지키는 일에 우선하는가? 예술의 가치는 희생을 정당화하는가?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본성을 알아보고 자신의 세계로 나아갈 것을 권하고 그 일로 인해 골드문트가 수도원에 불을 지른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으리라 말한다. 또한 골드문트가 여행(방랑)에서 돌아와 자신의 살인에 대해 고백했을 때도 그것을 탓하지 않으며 오로지 기도에 힘쓰지 않은 것에 대해서만 벌을 내린다.

한편 이 작품은 골드문트와 같은 기질-자유와, 사랑과, 감각을 느끼는 예민함-이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측면-규범과 체계를 지키지 않는 성향,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하며 그 외의 것을 무시하는 태도-을 보여준다. 가볍게 말하자면 '자유로운 영혼'은 '예술가 스타일'이며 그러한 성향은 '질서에 대한 도전이나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스토리나 서술 방식에 대해 첫째, 이 작품은 골드문트의 살인이나 간통에 대해 가볍게 지나치지 않았느냐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감각이나 쾌락에 치우친 삶이 가질 수 있는 한계로서 ‘또 다른 측면’을 어쨌든 보여줬으니 공평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 ‘또 다른 측면의 약점’이 ‘자아를 찾는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듯 이야기하고 있으니 치우쳤다고 볼 수 있을까? 골드문트가 살인을 한 데에 받아들일 만한 이유가 있었고, 간통을 한 것에 대해서도 당시의 혼인 관계가 사랑과 약속을 전제로 한 현대의 혼인 관계와는 다르므로 ‘도덕적 타락’이라고 볼 수는 없으니 정상 참작해야 하는 것일까?


골드문트가 어긴 '세상의 질서'의 정당성 여부나 그가 저지른 죄의 경중은 따져볼 문제겠으나 ‘도덕적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대체로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 행위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 예술이 주는 감동의 가치는?


나는 작년부터 유튜브 알고리즘의 신비로움으로 ‘마이클 잭슨’에 좀 빠졌는데 영상을 보던 중 충격적인 댓글을 보았다. 마이클 잭슨 아버지의 아동 학대를 두고 그 아버지가 아니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을 거라며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예술로 수많은 사람을 위로한다고 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행복의 총량이야 어떻든(마이클 잭슨 한 사람의 불행이 나머지 모든 사람의 행복의 총량보다 적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어떤 이득이 있든 옳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치 있는 창조물도 타인의 행복을 침해하여 얻어내는 것은 옳지 않다. 골드문트가 자신의 삶을 살고 그래서 삶의 진리를 깨달아 ‘소명’에 따라 후세에 남을 예술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옳고 그름이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 나르치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부하고 싶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골드문트의 삶이 그런 식으로 그려진 것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떤 것이 가지는 양면성을 쉽게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드문트의 본성은 양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끝내 타락으로 가지 않고 감각을 통한 경험으로만 성취할 수 있는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구체화하는 예술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나르치스는 다만 ‘기도하지 않은 것’을 벌했는지도 모른다. 이 ‘기도’를 ‘성찰의 자세’라고 해석한다면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일까? (사실, 어떠한 길을 가더라도, 세상의 질서에 따르는 길을 가든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가든 우리에게 이러한 ‘기도’는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말하는 '기도'는 종교적인 의미가 아니다.)

어떠한 본성이 이어지는 또 다른 측면에 대해 경계해야 하지만 경계하기 위해 본성을 억누르고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포기하고 끝내 자아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자아를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헤르만 헤세는 어쩌면 ' "불을 지른다고 하더라도", "간통을 하고 사람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가야할 길'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아닐까?



자아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며칠 전 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했다. 체육 대회를 하면 잊고 있던 것을 자꾸 새롭게 깨닫게 된다. 저 아이가 국어 수업 시간에 그렇게 무기력했던 것은 그 아이가 무기력한 아이여서가 아니었구나. 저 달리기를 잘하는 아이는 자신감이 있는 아이였구나. 모두 앞에서 춤을 추는 저 아이는 사실 적극적인 아이였네.


안타깝게도 이 모든 아이 각자가 가진 능력은 세상에서 전혀 요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 세상에서 요구하는 능력보다 더 좁은 범위의 능력을, 학교에서는 요구한다. 다양한 본성을 존중받지 못하고 이토록 좁은 범위의 능력을 강요 받는 아이들은 ‘자신감이 없는’, ‘소심한’, ‘무기력한’ 아이가 되고 만다.


그 아이들이 자라 또 우리가 된다. 세상에서 우리는 ‘나’와 맞는 옷을 입지 못하고 ‘나에게 요구될 거라고 추측되는 옷’을 입는다. 어쩌면 나에게 맞는 옷이 세상이 요구하는 옷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과, 상상 속 위험은 언제나 ‘추측되는 옷’을 찾도록 만든다.


내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던지는 질문에 푹 빠져버린 것은 많은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고민하게 되는 내 직업의 영향도, 자유로운 영혼 나의 첫째 아들의 영향도 있다. 어쩌면 어째서 나는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있는가, 하는 생각과 근본적으로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어떤 삶에 응원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는 고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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