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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의 버드나무 Jan 17. 2022

스페인 건물에는 0층이 있다

스페인 건물에는 0층이 있다. 


수학에서 0 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영을 기점으로 남아도는 상태를 양수라 하여 1, 2, 3...으로 그 반대인 부족한 상태를 -1, -2...로 나타내며 이것을 정수라 규정한다. 이 제로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것은 중동의 이슬람 문화권이었다.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동서양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있어 상업이 발달한 이슬람 문화권의 상인들이 이익도 안 나고 손해도 보지 않은 본전의 상태를 정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러한 영이라는 숫자를 포함한 정수의 개념으로 건물의 층을 표시하고 있었다.

영 층을 또한 그라운드(ground)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그라운드 바로 위층이 1층이 되며 그 이하는 지하 1층이 되어 숫자로 -1로 표시한다. 이런 개념은 영국과 같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영 층의 개념이 없는 동양권과 다른 생각이라 이색적이고 신선했다. 처음에 내 오래된 관념은 2층을 1층으로 1 층을 0층으로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때론 엘리베이터 층을 잘 못 누르기도 했다.  영 층을 지상층이란 개념의 그라운드라 부르는 것은 동양권인 우리나라와 같은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 1층인 공간을  영 층이라 생각하는 개념은  여전히  새롭다. 수리학적인 측면에선 영 층의 개념이 없는 우리의 사고방식보다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그 개념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니 재미있기도 해서 이것을 소재로 한 글을 쓰고 싶었다.


스페인의 대부분의 건물의 0층은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만 남기고 외벽을 치지 않은 개방적인 형태의 필로티 구조로 지어져 있다.

필로티 구조로 된 지상층은 주차장으로 사용되거나 건물 출입문을 중심으로 외벽을 세워 입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로비로 활용되기도 한다.


스페인에서 우리 가족이 제일 처음에 세 들어 살던 도심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의 지상층은 주차장으로 활용되었다.

두 번째 세 들어 살던 아파트는 상권이 발달한 도심 지역에 위치한 8층 건물이었다.

그래서 그 아파트의 영 층은 필로티 구조에 외벽을 세워 만든 상가로 쓰이고 있었다. 그 상가에  바게트 빵을 매일 구워 파는 빵 가게와 시디 음반을 파는 가게와 도자기 변기와 타일을 파는 건축자재 전문점이 들어와 있었다. 입주민들의 주차장은 지하층에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 아파트 건너편에 있던 아파트도 주상복합 아파트였다. 그 아파트 그라운드 층에는 사진관과 정육점이 있었고 채소와 과일가게가 있었다.

또한 우리 아파트 근처에는 그라운드 전체층을 점포로 사용하는 콘슘(cosume: 소비하다는 뜻의 영어)이라는 상호의 기업형 체인 형태의 중형마트가 있었다. 이 중형마트는 요즘 우리나라로 치면 아파트 상가 1층이나 지하층에 위치한 일반 점포보다 넓으며 작지만 별도의 주차장을 구비하고 있고 대형마트보다는 규모가 작은 마트에 가깝다.


이처럼 스페인의 필로티 구조로 된 영 층은 상권이 발달되면 언제든 상가로 변신할 수 있는 개방적이고 가변적인 공간이었다.


당시 20 년 전 우리나라에는 요즘처럼 기업형 체인 형태의 대형마트가 그리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은 요즘 우리나라와 같이 기업형의 중형마트와 도심 외곽에 위치한 창고형 대형 할인마트가 있었다.

또한 주상복합 아파트 그라운드 층에 기업형 마트와 달리 영세 상인들이 운영하는 소형점포들이 있었다.


그라운드 층에 위치한 소형 상점들은 빵을 구워 파는 빵집을 비롯하여 고기나 치즈와 하몽과 소시지를 파는 정육점과 생선, 과일, 채소 등 식재료와 생필품을 파는 생활 밀착형의 상점들이었다. 또한 카페나 바 그리고 간단하게 식사를 할 수 있는 음식점들이 지상층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나름의 골목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량으로 저렴하게 상품을 확보할 수 있는 기업형 대형 마트는 소형 상점보다 가격 경쟁력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런 유리한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각종 세일을 자주 하며 일정 구매량에 대해 인센티브를 주는 포인트를 지급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손님 끌기 작전을 펼치는 대형마트에 비해 소형점포들은 분명 경쟁력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같으면 대형이나 중형마트에 손님을 빼앗긴 영세 상인들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판일 텐데 그런 모습들이 스페인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소형점포들에도 생필품을 사려는 주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2 년간 지켜본 가게 중 망한 곳은 없었다.


그 이유는 주상복합 아파트에 사는 입주민이 접근하기 좋아서였을까? 


스페인 사람들의 주된 식재료인 바게트 빵을 매일 따근따근하게 구워서 파는 빵집은 망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샐러드용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고기와 생선도 중형마트보다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 신선도가 보장된다면 굳이 집에서 가까운 이웃 가게를 마다할 이유는 없을 듯싶다. 또한 그런 소형 상점은 수제 치즈나 하몽 같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특산물을 구비하고 있어 그런 제품을 선호하는 단골 고객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스페인에서 알게 된 친구들의 부인들은 자신들이 즐겨 가는 단골 식재료 상점 한두 곳이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주부들이 가을철 김장하기 전 알음알음 수제 고춧가루를 구입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또한 수제 도토리묵 가루나 메밀가루나 수제 참기름이나 들기름 등을 단골 가게에서 구입하는 경우와 같다 할 것이다.


또한 스페인 사람들은 집에서 요리를 하기도 하지만 영 층에 있는 카페나 바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즉 아침에 직장인들이 출근하기 전이나 출근 후 카페에 들러 크루아상이나 오믈렛 같은 간단한 요리를 커피와 곁들여 먹는 것이 스페인의 또 다른 풍경이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생일 파티도 당시 우리나라처럼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파티를 열어주기보다 카페나 바를 빌려서 잔치를 하는 것이 관습화 되어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사람들은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집으로 잘 초대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손님을 초대할 경우 자기 집 아래층에 있는 간이음식점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난 후 집은 잠깐 둘러보게 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다.


이런 문화 스타일을 몰랐던 나는 스페인에 살던 첫해 아이들의 생일파티를 집에서 열었다. 파티를 하느라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를 듣고 위층에 사는 주인이 내려왔다.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아이들의 생일 파티를 카페에서 연다고 했다. 

이를 참고로 그다음 해는 실내 놀이터에 가서 생일 파티를 했다. 실내 놀이터에서 실컷 놀게 한 뒤 실내 놀이터의 부속 매점에서 구입한 음료와 먹거리를 나누어 먹는 것이 또한 당시에 핫한 파티 문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 스타일로 인해서 주상복합 아파트에 위치한 많은 카페나 바 등의 소형 상점들에 손님은 늘 끊이지 않았다. 그 상점들은 기업형 대형마트에 밀려서 사라질 만큼 위태로워 보이지 않았다.


또한 작은 점포를 자주 찾다 보면 주인과 손님이 저절로 얼굴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작은 상점은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를 넘어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하며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기도 하는 사교의 장이 된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먼 나라 이웃 나라' 란 만화책이 크게 인기를 끈 적이 있다. 나도 또한 그 만화를 좋아하던 독자였고 저자인 이원복 교수가 그린 스페인 편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다. 그 만화에서 저자는 스페인 사람들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정이 많으며 얘기하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도 무척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내가 만난 스페인의 작은 점포 주인들은 손님이 오면 "올라 꺄린뇨"라고 다정하게 인사했다. 올라는 "안녕하세요"란 뜻이고 "까린뇨"는 부부나 연인들이 사랑스럽게 부르는 호격이다.


굳이 의역을 하자면 "안녕. (사랑스러운) 자기야 (예쁜아 )"의 의미를 가진 다정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이런 다정하고 상냥한 말을 건네는 가게 주인과 단골이 안되려야 안 될 수 없지 않은가.

이러니 골목 상권이 건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각각의 손님들의 특성과 취향을 잘 알고 배려해 주던 다정한 골목 상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갖는 양면성 중 하나인 효율성을 추구하는 거대 자본에 의한 잠식이라는 어두운 그늘로 인해 하나 둘 사라졌다.


2 년밖에 살지 않았던 이방인이었던 나의 관찰은 실상을 잘 모르는 피상적인 것이었을지 모른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스페인 또한 효율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그 모습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 올라, 까린뇨" 라며 이방인에게도 다정하게 말을 건넸던 유쾌하고 푸근했던 골목 상인들이 여전히 건재하기를 바랄 뿐이다.


주상 복합 아파트 지상층에 있는 상가의 모습.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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