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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의 버드나무 Jul 01. 2022

웨딩 문화의 변화

"결혼 준비하시느라 힘들었겠어요"

두 아이를 결혼시키면서 내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그러나 사실 아이들 결혼을 시키면서 내가 힘들었던 적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웨딩과 관련된 모든 절차가 상업적으로 상품화되어 있어서 결혼 당사자들이 선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웨딩 플래너라고 하는 신종 직업군의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통과의례를 잘 치를 수  있도록 다양한 내용을 담아 가격별로 차별화하여 패키지로 구성한 결혼 상품을 팔기 때문이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는 상품을 선택한다면  혹여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


또한  결혼의 주최자는 예비 신랑 신부이기 때문에 부모가 바쁠  일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부모가 바쁘게 되면 결혼의 주최자인 자녀들과의 갈등이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성경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 찌로다"라고 한 것처럼 예비 신랑 신부가 부모를 떠나서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가정을 꾸리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결혼일 것이다.


따라서 두 아이의 결혼 준비 과정에서 혼주 부모인 나와 남편은 아이들이 구상해 놓은 계획을 들어주고 조언해 주는 정도였다. 예식장을 정하고 모든 절차에 필요한 세세한 결정은 결혼 당사자들의 주관에 따라 이루어졌다.


물론 양가 부모 상견례를 할 당시 부모로서 큰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서 부모의 의견을 밝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관례적으로 시행되던 예단이나  폐백을  없애고  신랑 신부가 서로 주고받는 예물도  간소하게 실용적인 선택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사돈들도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작은 아이가 결혼할 무렵은 코로나19 확산이 심상치 않은 때라 거리 두기 및 모임에 대한 제한이 강력한 때였다. 따라서 직계가족만 참석하는 작은 결혼식을 거행하였다. 서양 영화의 결혼식에 나옴 직할 만한 작고 예쁜 정원에서  평소 직계가족과 일가친척만 모시고 자녀 결혼식을 하고 싶던 나의 로망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20대 후반에 내가 결혼할  당시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자녀 결혼을 시키면서 애를 많이 쓰셔야 했다. 오늘날만큼 상업적으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웨딩 상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축하객들을 대접할  음식을 혼주들이 손수 장만하는 것이었다.  손님 식사를 대접하는 음식점에서는 보통 잔치국수만  만들어 주었고 국수와 곁들여 먹을 기본  반찬은 혼주가 준비해야 했다. 지금처럼 뷔페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식 전날 음식 장만을 위해 친척들이 총동원되어야 했다.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쁜데 신부인 나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밤새도록 전을 부쳤고 결혼식 당일은 준비한 음식을 예약한 음식점까지 실어 날라야 했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부모님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결혼식과 관련된 모든 일을 진두지휘하셔야 했다. 그래서 당시에는 결혼이 그야말로  인륜지대사였던 것이다.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 하여 이른바 삼포세대라 불리는  우리 아이들이  상황에 떠밀려  비혼을 선택한 것이  아닌 좋은 짝을 만나 부모 품을 떠나 독립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저  자녀들이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기만 바랄 뿐이다.  


오늘날의 결혼식은 금전적인 여유가 있다면 이전에 비해 누릴 수 있는 것이 많고 무척 편리해졌으며 자녀 중심으로 결정되는 것이 많으므로 혼주인 부모가 힘든 일은 별로 없다. 그런 편리성만큼 쉽게 만나 쉽게 헤어지는 식으로 결혼의 의미가 가벼워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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