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오미크론 확산세가 하루 30 만을 찍고 있을 때 딸이 확진이 되었다.
딸은 오미크론에 확진된 초기에 상태가 매우 심해 뇌수막염 증세도 보였다.
뇌척수 검사 결과 다행히 뇌수막염은 아닌 걸로 진단이 나왔다.
그만큼 심각한 증상을 갖고 있었음에도 자가 치료를 해야 했다.
사위도 딸을 응급실로 데려가는 등 딸을 돌보다 확진이 되었다.
사위는 평소 축구로 다져진 건강한 체력의 소유자로 감기약도 먹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확진된 후 3~4일 동안 죽을 듯이 아팠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일주일 가까이 격리된 상태로 지내며 질병과 싸워야 했다.
딸은 열이 떨어진 후에도 후유증으로 머리가 계속 아프고 위장장애가 생겨 먹지를 못하고 계속 토하고 있었다.
혹시 입덧인가 싶을 정도로 위액의 쓴 물까지 토한다고 했다.
이렇게 가족의 돌봄이 차단된 채 자가 격리된 상황에서 배달 음식으로 연명하던 중 딸아이는 코로나 블루 증후도 보였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딸은 울산이 고향인 사위를 만나 울산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 하나 의지하고 친구와 친정으로부터 떨어져 모든 것이 낯선 곳이다.
남편을 비롯해 시댁 식구들의 따듯한 사랑을 받으며 적응을 잘하나 싶었다.
그러나 마음을 나눌만한 친구가 없는 데다 무엇보다 친정과 너무 떨어져 있으니 외로웠던 모양이다.
그러던 참에 일주일 동안 따듯한 돌봄도 받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겪다 보니 그동안 억눌러져 있던 외로움이 폭발했던 모양이다.
딸은 전화로 너무 힘들고 외롭다면서 갓 지은 밥에 엄마가 끓여준 김치 콩나물국과 조기구이를 먹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애끓는 말을 듣고 어찌 모성이 발동하지 않으랴!
그렇게 힘든 순간에 딸이 생각한 것이 산해진미로 된 진수성찬도 아닌 어릴 적 먹었던 소박한 음식이었다. 즉 고향의 맛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충분히 풀어줄 수 있는 어렵지 않은 소원이었다.
열일 제치고 가야 하나 '사위는 백년손님' 이란 통념이 있듯 쉽지 않은 결정이기도 했다.
시댁 식구들은 모두 일을 하고 있어서 그 두 사람을 돌볼 수 있는 여건을 가진 분들이 없었다.
이런 정황들로 인해 사위는 송구하지만 장모인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상황이니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오죽하면 사위가 나서서 장모에게 부탁을 하겠느냐며 흔쾌히 갔다 오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친정엄마로서 울산댁이 된 딸을 만나러 가게 되었다.
딸의 간병이 주목적이긴 하지만 나 혼자만의 여행길이기도 했다.
또한 내 머릿속에서 공업도시로만 인식했던 울산의 새로운 진면목을 발견한 시간이기도 했다.
울산에서 보고 느낀 이야기를 울산 탐험으로 풀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