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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도벽 할머니 - 3

2부. 스치는 사람들

by 김현정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연말이 되었다. 마트에서는 연말이 되면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쌀을 보낸다. 모금행사도 한다. 마트 이모님들과 직원들은 락커룸 앞에 있는 모금함에 돈을 넣는다. 백 원에서부터 만원까지 다양한 돈들이 쌓인다. 마트에서도 매출 집계를 하고 난 뒤, 여유 자금 일부를 보탠다. 그리고 마트에 방문한 손님들도 잔돈들을 기부했다. 각 계산대에는 빨간 열매 세 개가 붙어있는 사랑의 열매 저금통들이 맺혀있었다. 고객 서비스 센터에도 열매 저금통이 놓여있었다.


”이거, 어디다 내면 돼요. “


어색한 목소리로 안내데스크에 온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가져갔던 저금통 대신, 흰 봉투를 들고 왔다. 그 봉투는 꽤나 두툼해 보였다. 마트에서 한번 큰소리를 냈던 손님이라, 안내데스크에서도 긴장을 했었다. 보안팀 직원도 그를 알아봤었다. 하지만 위협적이던 그는 온순하고 부드러웠다. 긴장하면서 수줍게 들린 봉투는 그의 손에 꼭 쥐여있었다.


”네? “

”아니, 뭐- 여기서도 기부금 받는다길래. 그 왜- 불우한 이웃을 도웁시다. “


할머니의 아들은 묵직한 저금통을 받았다. 그저 처음에는 엄마의 돈을 되찾았다는 당당함이 있었고, 공짜돈이 생긴 것 같아서 기뻤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들도 아닌 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돈을 마트 사람들에게 줬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렇게 화를 내고 며칠을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꾸깃꾸깃한 돈을 한 장한 장 펼치면서 어머니의 물품들을 차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다른 마트에 갔다. 물건을 훔쳤다. 그런데 아무도 잡지 않았다. 집을 나간 지도 모른 채, 아들을 찾지 않았던 나처럼 아무도 잡지 않았다. 그게 슬펐다. 물건을 훔쳤는데, 아무도 몰라서 잡지 않는다는 것이. 그래서 나는 물건을 훔쳤다고 했다. 마트에서 아들한테 전화를 했다. 아들은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오늘도 물건을 훔쳤다. 이제는 내가 오면 다들 나를 쳐다본다. 도둑년이라고 막을 줄 알았는데, 내 뒤를 꼭 한 명씩 따라온다. 감시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물건을 훔쳤다. 그런데도 내가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이제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래도 마트에는 꼭 들린다. 아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짚었다가 내려놓는 게 마음이 편하다.’


‘마트사람들은 나한테 화내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물어본다. 어떤 여자는 나보고 엄마라고 해도 되냐고 했다. 내가 왜 지 엄마야.’


‘다들 착하다. 따뜻하다. 물건도 사지 않고, 물건 훔치는 나한테 친절하다. 가엾어서 그런가. 가여워 보이겠지. 그래도 대놓고 동정은 안 해서 좋다.’


‘오늘은 천 원을 줬다.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걸로 뭘 하겠냐만은 고마움을 표시할 길이 그거밖에 없네. 아들한테도 버려진 나인데.’


짤막하게 쓰여있는 노트는 꽤나 낡았고, 두꺼웠다. ‘일기장’이 아니라 ‘마트일기’라고 쓰여있는 노트였다. 아들은 노모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연락할 수단으로 마트에 들렀고, 그렇게 들린 마트에 정이 들어서 매주 발걸음을 했던 노모를 알게 되었다. 노모의 외로움은 마트에서 해소되고 있었다. 매일같이 가고 싶지만 거동이 힘들어서, 폐를 끼치는 게 싫어서. 하지만 그 따뜻한 배려가 좋아서. 매주 가는 노모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들은 엄마가 미웠다. 어릴 적부터 방치되었던 자신에 대한 연민과 성년이 되어서도 별 볼 일 없는 엄마가 싫었다. 그는 그랬던 엄마에게 화를 내고 있었고, 연락을 끊었다. 하지만 이 일기장의 엄마는, 단순히 자신이 미워한 엄마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지독한 외로움이 느껴졌기에, 연민이 생겼다. 그냥 그런 보통의 사람이자 엄마였다.

‘아들아. 나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너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것이 너무 미안하더구나. 네가 집을 나간 사실조차 몰랐다. 그러다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한편으로는 안심도 했어. 입을 하나 덜었구나. 하고 말이야. 그러다가 그게 얼마나 미련한 생각인지 알게 되었다. 한숨 돌리고 너를 찾고 보니, 앞에 당당히 나설 수는 없었지만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더구나. 내가 밉겠지. 싫겠지. 끝까지 짐이었던 내가 죽길 바랬을 거야. 죽어서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내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마트일기의 뒷장에는 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많았다. 죽어서 남길 것이 없어 미안하고, 짐이 되어 미안하고,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딱 한마디. 잘 살고 있어서 고맙다는 말과 말이다.

아들은 생각했다. 가난에 허덕이면서 자신을 외면했던 어머니가 어찌나 미웠던지. 자잘한 사건은 기억나지 않는다. 희미할 뿐이다. 다만 가난이 싫어서 도망쳤던 것은 분명했다. 그 감정은 여전했다. 그 가난이, 어머니의 무능함이 싫었다. 나약함이 싫었다. 어머니는 나약했다. 나약한 자신이 얼마나 무능력한지에 대해서도 뻔뻔하게 늘 말하고 있었다. 자신은 못 배워서, 그런 것을 잘 몰라서, 그래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도 당연하다고 했다. 힘들게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보다도 힘들어 지친 스트레스를 어린 자신에게 푸는 철없는 엄마에 진절머리가 난 아들이었다.

다 늙어, 이만큼 외롭게 살다가 죽은 노모였다. 그런 노모에게 더 이상의 분노는 의미가 없을 뿐이었다. 자신을 갉아먹는 어린 시절을 떨쳐내야 했다. 나의 미웠던 엄마 대신 외롭게 간 한 사람을 보내주고자 했다. 꼬깃한 지폐를 보면서 다시 아들은 생각했다. 그런 노모에게 따뜻했을 마트의 사람들. 자식도 아닌 이들이 직장에 나와 당연하지 않을 친절과 배려를 베풀 때,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 나는 이 돈이 크게 필요하지가 않다. 나는 이 돈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 우리 할매가 줬던 돈. 마트 그. 발전기금? 뭐 직원들 위해서 그런 거에 쓰시던가. 아니면 불우이웃 성금에 보태 쓰던가 “


이번에도 짤막한 말만 남긴 채, 흰 봉투를 안내데스크에 무심히 던지고 간 아들이었다. 그 봉투에는 할머니의 이름 석자와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다. 고인이 되어서야 알게 된 할머니의 이름과 함께 불우이웃들에게 쓰였다. 그렇게 그 해에 마트는 평소보다 더 큰 기부금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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