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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전 아저씨 -1

2부. 스치는 사람들

by 김현정

”쯧쯧, 젊은 나이에 – 이런 거나 하고 말이야. “


더운 여름날이었다. 아영은 맥주 시음행사를 하고 있었다. 마트의 내부는 에어컨이 무색할 정도로 더웠다. 많은 인파는 더위를 피해 마트로 놀러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카트를 끌고, 시끌시끌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덥다 보니 조금만 살이 닿여도 날카로운 짜증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쯧, 공부를 해야지. 인생 포기 했어?! “


50대 중년으로 보이는 김씨는 20년 전의 법전을 들고 마트를 돌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카트 대신 책만 들려있을 뿐이었다. 진갈색의 카라가 있는 반팔티를 입고, 등산바지를 입고 있었다. 옷은 깔끔했지만, 얼굴에 땀이 흐르는 그의 모습은 꾀죄죄했다. 그는 시음과 시식행사하는 판촉행사하는 사람들의 앞으로 가서 시식과 시음을 하고는 핀잔을 주고 있었다.


”쯧, 인생 패배자들만 모여있는 곳이네. 한심하다. 한심해. “


큰 목소리로 다가오던 그는, 결국 아영 앞에도 섰다. 아영을 빤히 쳐다보면서 위아래로 훑었다. 그는 혀를 크게 찼다. 멀쩡하게 생긴 ‘년’이 이런 일을 한다며 욕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맥주나 따라보라고 했다. 아영은 싫은 내색 없이 술을 주었다. 아영도 김씨의 방문이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연민도 아니었다. 주류행사 첫날부터 아영 앞에서 욕을 하던 김 씨는 벌써 3일 차. 이상한 방문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영이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 김씨는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아영에게 여김 없이 술 따르는 여자라며 부끄러운 줄 알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러 왔는데요. “

”공부 못하니까, 이런 일 하는 거 아니야. 공부했으면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서 과외나 했겠지. “

”공부 못하진 않는데요. “

”너 대학이 어디야?! 어디서 어른 말하는데 말대꾸야! “

”저 법대 다녀요. “

”뭐?! “

”법대 다닌다고요. “

”그럼 이거 알아? “


김씨가 가리키는 책은 누가 봐도 법전이었다. 그저 오래된 법전. 아영의 눈에는 그 법전은 그저 고물이었다. 20년의 세월 동안 법률용어가 바뀌었고, 적용범위가 수시로 바뀌고 있었다. 아영에게는 그 법전을 들고 있는 김씨가 애잔하기도 했다.


”소법전이네요. 그것도 20년 전. “

”한자 읽을 줄 알아? “

”알죠. “


김씨는 아영의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에 좋은 상징적인 물건을 무시하는 것 같은 말이 듣기 싫었다. 20년 전의 물건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청춘을 바쳤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자신의 법전을 무시하는 것은 곧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마트에서 일하는 어린 계집 따위가 자신을 무시했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김씨는 침 튀기며 욕을 했다. 그리고 그는 곧장 마트 밖으로 나갔다.


”법전 또 왔냐? “

”법전이요? 저 아저씨 법전이에요? “

”유명해. 뭐 소문에는 사시 계속 떨어져서 미쳤다나. “

”안타깝네요. “

”너한테 뭐래? “

”술 따라주는 년. 술이나 따르라던데요. “

”미친. 근데 너랑 대화하는 거 같더니. “

”공부 못해서 이런 일 한다고 뭐라고 하길래, 법대 다니는데 아르바이트하러 왔다고 했어요. “

”뭐래? “

”보시다시피. 그냥 갔어요. “


한동안은 김씨는 마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영은 안심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을 태연하게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하게 따르기란 힘든 일이었다. 자신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대놓고 자신이 하는 일에 핀잔을 주는 이에게 그렇지 않다고 응수를 하는 것도 꼴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행사가 곧 끝이 난다. 아영은 자신의 행사가 끝날 때까지 김씨가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어, 아직도 일 하냐? “


김씨는 결국 아영의 앞에 서 있었다. 행사 종료일 3일 전. 아영은 김 씨의 비장한 눈빛에서 자신을 얼마나 괴롭히려고, 작정하고 온 듯한 그의 모습에 속으로 욕했다. 김씨는 여전히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책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민법강의’를 들고 있었다. 그 두께는 소법전의 두께를 능가했다. 크기도 컸다. 이 더운 여름날, 그 책을 들고 온 김씨는 더욱더 이상해 보였다. 빛이 바래고, 두꺼운 표지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들기 힘든 책을 김씨는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법대생? “

”네. “

”이거 읽어봐. “


초록색 띠지가 네 개가 둘러져있었다. 민법강의의 제목은 한자로 쓰여있었다. 아영의 전공 수업책은 아니었다. 다만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서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몇 번 본 책이긴 했다. 아영은 김씨가 들고 왔던 소법전보다도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아영의 민법강의 책은 너덜하지 않았다. 새책처럼 꽂혀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 보지 못했다. 아영의 현실을 알려주는 책장 속에 있는 책이었다. 공부를 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팠다. 아영은 대답하기 싫었다. 하지만 김씨의 표정에서는 비웃음이 있었다. 그럼 그렇지-라는


”민법강의“

”읽을 줄 아네? 지금 보니까 다른 년놈들이랑 다르게 똘똘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

”법대생 중에서 그 책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그런 말씀하시면 안돼요. “

”근데 왜 이 일해? “

”돈 벌러 왔죠. “


아영의 앞에서 끈질기게 질문하는 그가 거슬렸다. 다른 손님들은 시음을 하기 위해 왔다가, 한 손으로도 들리지 못하는 두꺼운 책을 들고 삐딱하게 서있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그냥 가버렸다. 아영은 다른 손님을 원했다. 앞의 김씨가 아닌 다른 이에게 평소처럼 맥주를 권하고, 가볍게 목례하면서 마시고 가볍게 자리를 뜨는 손님을 맞이하고 싶었다. ‘맥주 할인하고 있습니다. 시음해 보고 가세요!’라고 뒤돌아가는 손님에게 소리쳐봤지만, 손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영은 짜증이 났다. 매출과 아영의 일급은 비례하지 않는다. 다만 시음을 위해 따놓은 맥주 김이 빠지는 것이 아까웠다. 아무런 감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치는 손님들 대신, 신경을 쓰이는 김씨가 귀찮을 뿐이었다.


”법대생이면 공부해야지. 고시준비해야지. 여기서 시간낭비를 해?! “

”시간낭비 아니고, 돈 벌고 있습니다. 공부하고 있어요. “

”너 겨우 턱걸이로 갔지?! 공부 못하지?! “

”장학금 받고 있습니다. 손님. 맥주 지금 할인 중입니다. 저렴하게 드리고 있어요. “

”지랄. 거짓말. 장학금 받을 정도로 똑똑한 년이 왜 이런 일 해. 학생증 까봐! “

”... 죄송합니다. 손님. 학생증은 까드릴 수 없고, 저는 현재 일하는 중입니다. “


아영은 실수했음을 알았다. 자신이 법대를 다닌다는 말을 왜 했고, 그에게 왜 응수를 했을까. 애초 이상한 사람에게는 말대꾸는 금물이다. 그게 당연했던 건데 깜빡하고 있었다. 그저 소법전을 들고 와서 시비를 거는 김씨가 거슬렸을 뿐이었다. 감정적으로 대했다. 평일 더운 날에 20년이나 더 된 소법전을 들고 어슬렁거리는 김씨가 한심했다. 현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실패를 남에게 훈수하는 것 같아서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아영은 쓸데없는 말을 했다.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글아! 너 마트에서 일할 때, 이상한 사람들한테 절대 말대꾸하지 마. “

”안 해요. “

”너 무시하는 사람 있어도 절대. 말대꾸하지 마. “

”제가 왜 하겠어요. “

”보통은 안 하는데, 말려. 진짜 이상한 사람 나타나면 말려. “

”언니 그런 적 있어요? “

”나는 뭐, 딱히 말리지 않았는데, 꼭 마트에 보면 직원들 무시하러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들, 그냥 다 무시하는데, 꼭.. 좀 학벌 좋고, 똑똑하다는 애들이 말려. 그런 사람한테. “

”에이, 제가 뭐-“

”음.. 마트에서 그렇게 무시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 무시해서 자존심 세우고, 자존감 키워보려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보니 심한 말이 오가기도 해. 내가 아니니까 상관없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 되는데, 가끔 그러지 못할 때가 있거든. 그걸 걱정하는 거야. “


아영은 커피언니의 말이 떠올랐다. 아영은 말린 것이었다. 과도하게 손님에게 자신을 피력했다. 물건이 아닌, 자기는 이런 사람이라고 말했다. 손님은 아영에게 관심이 없다. 그저 물건을 팔겠다고 짧은 치마를 입고,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아영을 무시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았고, 부끄러워 며칠을 피했지만, 계속 마트에 서서 일하는 아영은 자신보다 못한 위치에 있는 이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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