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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법전 아저씨 -2

2부. 스치는 사람들

by 김현정

”학생증 줘! “

”죄송합니다. “

”야! 나 무시해?! 나 K대 법대 나왔어! 내가 어! 어떤 사람인 줄 알아?! “


김 씨의 목소리는 커졌다. 아영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몸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아영은 뒷걸음을 쳤지만, 도망갈 수는 없었다. 김씨의 언행은 점점 거칠어져 갔고, 급기야 시식대를 밀기 시작했다. 아영은 무서웠다. 몸싸움이 벌여질 것 같은 그쯤 보안팀의 사람들이 왔다. 처음에는 소란스럽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슬렁어슬렁 천천히 오고 있었는데, 김씨와 아영의 대치상황을 보고 보안팀직원은 달렸다. 그리고 무전을 받은 인사과장도 함께였다. 김씨와 아영을 떨어트리고, 잠시 아영의 시음대는 철수시켜야 했다.


”아영씨. 하아.. 아영 씨 뭐 하러 왔어요? “

”일하러 왔습니다. “

”정확하게 무슨 일. “

”맥주 시음행사하고, 맥주를 팔려고 왔습니다. “

”그래요. 정확히 아네. 그러면? “

”네? “

”아영 씨의 자기소개가 필요해? “

”아니요.. “

”뭐, 법대 다니는 알바생이 파는 맥주는 뭐가 좀 달라요? 그렇게 생각해?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뻔히 피곤한 사람인 거 알면서 대충 둘러대고 하면 되잖아요. “

”죄송합니다. “

”머리 안 나쁘다며! 공부 좀 했다고, 아영 씨가 잘난 거 같아? 학교랑 같은 줄 알아요? 성적순- 학교이름으로 여기 섰어? 그냥 일하러 왔잖아. 일을 왜 키워요. 파견회사에서 따로 교육받거나 조심하라는 거 못 들었어요? “

”아니요.. 저도 모르게.. “

”하아.. 아까 그 법전 들고 다니는 아저씨. 우리 마트지점에선 유명한 분이에요. 그래서 다들 그냥 대꾸 안 해. 여기 여사님들도 왕년에 다들 한가닥 하셨고, 지금도 남편이 짱짱한데, 용돈벌이 하시러 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래도 아무 말 안 해. 무시해도,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 들린다- 한다고. 본인만 잘난 줄 알아요? 그렇게 생각해? “

”죄송합니다.. “

”회사에는 연락 별도로 안 할게요. 처음이기도 하고, 뭐, 지금 하는 행사가 술이기도 하니까, 그 양반이 어떤 말했을지 짐작 가니까. 그래도, 나이 어려서 몰라서 그랬다는 건 알겠고.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조심해요. 그 손님 또 보여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이런 걸로 서로 피곤하게 하지 맙시다. 이제 어른이야. 당신. 아이 아니라고. “


과장은 묘하게 반말을 섞어서 말했다. 아영은 그 부분이 묘하게 거슬렸다. 자신이 나이가 어려서 그런것일까, 파견직원에, 자신보다 아래의 위치에 가진 사람이기에 막대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하여 오로지 다 반말을 쓰는 것은 아니니, 어느정도 너를 존중한다는 표현으로 저렇게 말을 섞어쓰는 것일까? 라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아영에게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위치만을 더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 같아, 그 현실이 싫었다.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나마 아영은 이번일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늘 주변에서 주의를 주던 이야기의 의미를 알게되었다. 몸소 느끼게 되었다. 알게 된 건 고치면 된다. 그도 그럴것이 마트에는 많은 손님이 온다고 들었다. 좀 예쁜 언니들은 번호를 달라며 끈질기게 쫓아오는 손님도 있고, 욕하면서 무시하는 손님들도 있다고 했다. 물건이 아닌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손님을 대하는 방법은 무시라고 배웠다. 개인정보노출은 금물이었다. 출근시간, 퇴근시간, 전화번호,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 사는지. 너무 당연하게도 그런 사소한 개인정보노출은 금물이다. 오로지 근무할 때의 명찰에만 남겨있는 이름만이 유일하게 보일 수 있는 정보였다.


”주제를 알아야지. 천한 년. “


여김 없이 법전을 들고 나타나는 김 씨는 아영을 볼 때마다 욕을 했다. 이제는 하루에 3번은 아영의 앞으로 지나갔다. 욕을 하기도 하고, 위협적으로 몸을 들이대기도 했다. 아영은 무서웠지만, 피하고 싶었지만, 울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영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앞에 있는 김 씨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었다. 김 씨는 시음은 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맴돌면서 아영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아영은 그를 제지할 수 없음에 무기력해지기만 했다. 패기 넘치는 20대에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는 것이 어려웠다. 의젓하게 일하러 온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세의 방법이 영락없는 아이였다고 혀를 차는 상사의 말은 가시 같았다. 아팠다. 김 씨에게 직접적으로 당하는 모욕보다도 아영의 부족함을 꼬집는 듯한 그 말이 더욱 힘들었다.


”법대 다닌다고 뻥이나 치고 말이야. 개 같은 년. “


욕은 점점 심해졌다. 무시할수록 더욱더 강하게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보면서, 아영에게만 다가가지 않기를 바랐다. 소리로만 욕하는 그와 속을 삭히는 아영을 보면서 조마조마했다. 몇몇 손님들은 김 씨에게 왜 그렇게 말하시냐면서 막아주기도 했다. 아영은 벌을 받는 학생 같았다.


”고객님, 저희 직원들에게 더 이상의 욕설은 그만해 주십시오. “


인사과장은 마트를 돌다가 아영 앞에서 욕하는 그를 보았다. 아영은 이미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지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신난 그는 더욱더 신랄하게 욕하고 있었다. 주변 직원들은 아영의 난처함을 못 본 체할 뿐이었다. 과장은 아영에게 모진 말을 했던 날. 너무 했나 하는 생각에 후회도 했었다. 아영은 항상 예의 바르고 적절하게 손님을 대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번에는 유독 아영답지 못한 태도에 의아하며 화를 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잘못된 건 잘 못된 거니까, 하며 애써 미안한 내색을 하지 않았는데, 아영을 위협하고 있는 김 씨를 보고 있자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넌 뭐야? “

”여기 직원들 관리하는 담당자입니다. “

”오, 나랑 말 섞어도 되는 사람일세. “

”여기 있는 직원은 다른 회사에서 파견된 직원입니다. 행사 끝나는 대로 이제 안 나올 겁니다. 매장 이용 시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

”소속직원도 아닌데 챙기는 거 보니까, 역시 배운 사람이네. 마음이 커! 아니- 내가 여기 마트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영 직원들 수준이 별로야. 직원들 수준도 관리해야지. “


김 씨는 과장의 옆으로 달라붙었다. 과장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인사과장은 김 씨를 데리고 아영에게로부터 멀리 떨어지고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에 아영은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욕을 했더라면 아영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 눈물은 김 씨에게 빌미를 주는 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해진 아영을 보면서 더 닦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하는 중에 흘리는 눈물은 억울함과 분함이 섞여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영의 눈물을 보면, 아영을 안타까워하는 것보다도, 역시나 어려서 그런가 보다-라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두려웠다.


”그래도 착하네. “

”누가요? “

”과장. “

”네, 뭐, 덕분에. “

”언제까지야? “

”내일 행사 끝이요. “

”다행이네. “

”이 마트는 파견 가라고 해도 이제 안 올래요. 미친 새끼“

”여기 지점이 다른 마트보다 커서 그렇대. 이상한 사람들 많이 온다나 봐,“


멀어지는 과장을 보니, 아영은 과장이 고맙기도 하고 밉기도 했다. 마트에서 일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아영은, 과장에게 한소리를 듣고, 모욕적인 언사를 당할지라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자신의 무력함에 한탄했고, 같은 내부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아야 하는 자리라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파견직원일지라도, 소속된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원은 그저 고객을 응대하는 부속품 마냥 취급했다. 적어도 아영은 그렇게 느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영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법전을 들고 있는 김 씨가 보였다. 김 씨는 꺼져가는 마트 입구에 서성이고 있었다. 불이 꺼지는 걸 아쉬워하는 눈빛이었다. 아영은 김 씨에게서 어른 시선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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