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근네모 Apr 24. 2024

내가 오직 '나'라는 착각

[북리뷰] 김초엽 「파견자들」을 읽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만난 뒤로 김초엽은 쭉 내 최애 작가 중 하나다. 그래서 김초엽을 읽을 때면 소설 밖의 글도 주의 깊게 읽는 편이다. 이를 테면 작가의 말이나 인터뷰, 다른 비문학 책들. 그런 글에서 김초엽은 본인의 작품이 어떤 생각에서 처음 착안한 것인지 정보를 주곤 하는데 그게 항상 재미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스펙트럼」은 '반려동물이 인간보다 수명이 길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했고, 「지구 끝의 온실」은 '언젠가 지구 종말이 온다면 식물로부터가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출발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파견자들」도 작가의 말에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의 출발점을 밝히고 있다.


 몇 년 전 한 미술 전시에서 발표한 짧은 이야기가 이 소설의 씨앗이 되었다. 그때 나는 인간이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그래서 인간은 물질적으로 바깥 세계와 뒤얽혀 있고 그 사실은 우리의 세포와 단백질, 분자 하나하나에 새겨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게다가 인간의 몸속에는 수많은 '외부에서 온 존재들'이 같이 살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실제로 우리를 구성한다. 인간이 '우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꼭 인간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은 혼자 공상하다가 깨닫고 금세 잊어버리곤 하는 생각들을 이런 멋진 이야기로 빚어낼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소설가란 새삼 엄청난 직업이다.


 김초엽은 작가의 말에서 글을 쓰며 참고한 책으로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내가 된다는 것」, 「탈인지」, 「이토록 굉장한 세계」이렇게 총 네 권을 꼽았는데, 나는 문학편향적 독서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 중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대신 읽는 내내 일본 만화 기생수」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가 떠올랐다.


 「기생수」는 외계생명체가 지구를 침범하여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뇌를 먹고 몸을 점령하는 이야기다. 주인공은 이 외계생명체가 오른쪽 팔로 침입했을 때 바로 팔을 묶음으로써 뇌를 먹히지 않았다. 대신 이 생명체에게 '오른쪽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채로 기묘한 공생을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둘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점차 서로의 방식에 적응한다. 주인공은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오른쪽이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터득해가는 것이다. 꼭 「파견자들」의 태린과 쏠을 닮았다. 함께할수록 두 존재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뒤섞이는 모습은 「파견자들」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 자아가 사실은 허상에 가깝다는 것을 빗대어 보여준다. '나'라고 했을 때, 그건 오직 '나'가 아닐 수도 있다.


 읽은지 너무 오래되어 이제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 「개미」가 떠올랐던 것은 범람체들이 지성을 가진 존재들이었다는 게 밝혀진 시점이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감각 체계를 가진, 균류에 가까운 그들이 볼 때는 지구의 주요 문명은 인간이 아닌 균류와 개미들의 것이었다고 했다. 「개미」에서 외계인들이 지구에 사절단을 보내게 된다면 지구의 대표로 인간이 아닌 개미를 택할지도 모른다고 했었던가. 인간 특유의 자의식 과잉을 깨부수는 충격적인 발상이라 다른 내용은 까먹었어도 그 대목만은 기억이 난다. 「파견자들」의 범람체들과 같다.


 다만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 즉 '감각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것이 「개미」와는 또다른 디테일함이다. 단순히 번성한 정도를 따진 것이 아니라, 시각보다는 다른 감각에 의존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인간 문명이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지구의 다른 동식물이나 곤충만 해도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한다. 하물며 외계에서 온 범람체들은 어떨까. 그들의 세계에서는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이루어진 인간 문명은 알아차리기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인간으로서 가진 자의식 과잉을 버리고 세계가 인간의 관점과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태린은 쏠을 통해 범람체로서 세상을 감각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김초엽의 문장을 따라가다보면 덩달아 그 감각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각각 다른 개체이면서도 하나의 연결망을 이루어 전체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자아를 버림으로써 감각할 수 있는 더 넓은 자아 여집합의 세계를 상상해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설령 그 세계가 잘 상상이 가지 않더라도 내가 보는 이 세계는 단지 감각을 통해 재구성한 것일 뿐이며, 세계는 감각 밖에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세계는 조금 넓어진다.




 김초엽이 그리는 SF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늘 사이보그가 주요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밝혔듯이 김초엽이 보청기를 사용하는 자신을 사이보그로 정의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보그라는 단어가 직접 쓰이진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사이보그들이 등장한다. 머릿속에 기억을 도와주는 장치, 뉴로브릭을 심은 사람들이다.


 김초엽이 그리는 사이보그는 어딘가 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편리하고 근사해보이는 한편으로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편한 이음매까지도 가감없이 묘사하기 때문이다. 태린은 뉴로브릭 적응에 실패한 사람이다. 아주 어릴 때 이 시술을 해야만 적응할 수 있는데 그 나이를 넘긴 탓이다. 그래서 처음에 쏠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그걸 뉴로브릭의 오류로 착각하기도 한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이런 이음매의 현실적인 디테일들이 이 낯선 SF 세계를 우리 일상의 것들과 겹쳐보이게 만들며 익숙한 착각이 들게 만든다. 김초엽만의 매력이다.


 내가 생각하는 김초엽 SF의 또다른 특징은 바로 '따뜻함'이다. 김초엽의 작품세계는 점점 방대하게 뻗어나가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내가 처음 매료되었던 온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김초엽의 SF는 SF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SF 세계관이라면 당연히 등장해야 할 진보한 과학기술과 미래 세상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내는 한편 그것들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주목한다. 어차피 빛의 속도로 갈 수는 없다면, 우리의 세상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가. 김초엽은 일관되게 그 방향성을 묻는다.


 태린은 범람체에게 지구를 빼앗긴 시대에 지하도시에서 태어나 지상으로 나아갔으며, 범람화 된 인간으로서 범람체를 증오하기보다 '늪인'이 되어 공존하는 삶의 방식을 택한다. 암울한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제프를 잃고 자아를 잃는 두려움을 겪으면서도 태린은 증오가 아닌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간다. 막다른 곳에서는 언제나 다정함보다는 시니컬함이 쉽고 사랑보다는 증오가 쉽기 마련인데 김초엽이 그리는 인물들이 더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은 김초엽이 지향하는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뻗어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김초엽의 세계관은 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생각하고 있고, 거기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깔려있어 그게 좋다.

매거진의 이전글 가부장제의 다음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