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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네모 Apr 27. 2023

가부장제의 다음 시대?

[북리뷰] 이슬아「가녀장의 시대」를 읽고


 제목으로부터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책이 있다. 이슬아의 <가녀장의 시대>도 그런 축에 속한다. 가부장제로부터 벗어나 그와 대비되는 세계를 그리겠지. 하지만 왜 가'모'장이 아니라 가'녀'장일까? 소설을 끝마친 내 결론을 말하자면 가부장제의 다음 세대인 딸들이 물려받아 이제부터 새로 열어나갈,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세대이기 때문에 가녀장의 시대라 명명한 것 같다. 말하자면 '가녀장의 시대'는 이슬아가 그리는 소박한 유토피아다. 


 <가녀장의 시대>는 '소설'이다. 워낙 에세이로 익숙하게 접하던 작가이기도 하고 소설 주인공 이름이 '이슬아'인 데다 등장 인물들까지 죄다 이슬아의 에세이에서 만난 적 있던 인물들의 실명과 상황을 그대로 차용했다보니 처음에는 에세이로 착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뜯어보면 조금씩 이슬아가 만들어낸 세계가 현실을 대체하고 있다. 많은 부분을 바꾼 것은 아니다. 가만 들여다보면 <가녀장의 시대>의 배경은 가부장으로부터 벗어난 전혀 다른 가상의 세계가 아니다. 소설 속 사회는 여전히 우리가 아는 가부장제다. 주인공 이슬아는 브라를 안 해서 m&m 초콜릿 한 알보다 작은 크기의 유두가 옷위로 형태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방송에서 짤리기도 한다. <가녀장의 시대>에서 '가녀장의 시대'를 맞이한 것은 오직 주인공 이슬아가 살고 있는 집, 단 한 가정뿐이다. 다만 그 작은 허구의 세계가 제법 유쾌하고 시원하고, 합리적으로 느껴져 나도 언젠가 한 집안의 가녀장이 될 것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그렇담 가녀장의 시대는 가부장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우선 이슬아가 가녀장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이슬아가 가족회사인 출판사를 차려 부모를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부장이든 가녀장이든 자본주의를 벗어날 수는 없는 법. 경제적 주도권이 곧 가장을 만든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슬아가 단순히 경제적 주도권을 잡아 가부장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선대 가부장의 실수를 바로잡으며 새로운 시대를 개척한다는 것이다. 가부장이었던 할아버지의 시대와 눈에 띄는 차이점은 가녀장 이슬아가 이끄는 집안은 아내이자 어머니인 사람의 희생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순히 가사노동을 잘 돕고 분담하는 것이 아니다. 가녀장 시대에는 가사노동에 대한 존중이 있다. 가녀장 아래에서 엄마 복희는 가사노동에 대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대가를 받는다. 정당하고 합리적인 대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중과 정확히 동의어다. 요리를 담당하는 복희 씨는 청소를 담당하는 웅이 씨보다 대체불가한 노동이라는 점을 인정 받아 보다 높은 임금을 책정 받으며, 어머니 존자 씨네 집에 된장을 만들러 갈 때는 된장 출장을 인정 받아 된장 보너스를 받는다. 김장철에는 당연히 김장 보너스가 내려온다. 가녀장의 시대에 당연시 되는 노동은 없으며, 당연한 대가가 있을 뿐이다.


 <가녀장의 시대>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통쾌하게, 현재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고 마는 불합리한 구조를 시원하게 짚어주고 풀어준다. 가부장제의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주요 키워드는 굳이 꼽자면 페미니즘이겠으나, 내가 많이 읽었던 다른 페미니즘 문학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나는 사실 페미니즘 소설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을 <82년생 김지영>이나 그 유의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는데, 작품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눈에 보이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의 여러 어두운 면을 짚어내는 것이 나에게 다소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불편한 진실을 일깨우는 것이 문학의 순기능이겠으나 유튜브 한 편 보기 힘들어 쇼츠만 넘기는 내게 솔직히 너무 무거운 주제는 버거울 때가 있다. 여가 시간엔 유쾌해지는 독서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가녀장의 시대>는 스트레스가 없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읽는 내내 유쾌하다. 비판보다는 대안 제시에 가까워 생산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가부장제만을 보고 자란 딸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소설이다. 앞으로 나도 이런 유쾌한 가녀장의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을까. 실은 집안은커녕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 역시 가녀장은 못 될 것 같지만 적어도 악습은 되풀이하지 않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할 것 같다. 읽은지 꽤 된 소설이지만 인상 깊어서 아직까지 내용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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