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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근네모 May 14. 2024

글쓰기는 소화에 좋으니까

쓰고 또 쓰다 보면 언젠가는 이겨내겠지

 요즘 엄마와의 갈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원인은... 잘 모르겠다. 엄마와의 갈등은 코인 시장과 비슷하다.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용하는 인과가 있을 텐데 도무지 짚어낼 수가 없다. 내가 잠자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도 쉼 없이 움직이며 상한과 하한을 빠르게 오간다. 나는 그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그래프를 따라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가슴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한다. 최근에는 갈등이 또 다른 고점을 향해 떡상하고 있다. 일상을 휩쓸어가는 이 가파른 우상향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든 숨통을 트려고 발버둥 치는 것뿐이다.


 나의 원가정,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자란 가정에는 예전부터 이런저런 탈이 많았다. 털어서 콩가루 한 줌 안 나오는 집이야 없겠지마는 우리 집은 좀 심했다. 그래서인가 나이도 제법 먹었고 남편과 신혼살림도 차렸지만 여전히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모의 그늘'이라는 말을 보통은 부모의 보호라는 의미로 쓸 테지만 내 경우엔 다르다. 말 그대로 그늘이다. 나의 어두운 부분이자 벗어날 수 없는 그림자다. 평생 떨쳐내려고 애써왔지만 잘 안 됐다. 내가 이 그늘을 벗어나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잘 꾸릴 수 있을까?


 내 평생을 지배해 온 그 물음에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떤 날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어떤 날은 글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기 위해 용쓰고 있다. 나를 믿고 결혼한 사람이 있으니 그래야 도리일 것 같다. 운동도 해보고, 상담도 받아보고, 이런 글도 써본다. 글을 쓰는 것은 감정을 소화하는 데 제법 도움이 된다. 상담사 선생님도 계속 써보라고 권했다. 공개적인 플랫폼에 올리기는 조금 낯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사는 것이 우선이니까. 두서없는 글을 어떻게든 고 지우고 또 써본다.




 얼마 전 부모님이 이사를 했다. 상담사의 조언대로 당분간 엄마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이삿짐을 옮기는 동안 강아지를 맡아줘야 해서 잠시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래봐야 강아지를 돌려주며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10분이 채 안 되었는데, 그 짧은 사이 엄마는 내게서 불편함을 기민하게 캐치해냈다. 이만 가겠다고 신발을 신는데 그딴 식으로 굴 거면 다신 오지 말라는 소리가 냅다 뒤통수에 꽂혔다.


 익숙한 일이었지만 이번엔 남편도 옆에 있었다.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가슴이 뜨끔했다. 수치심이었다. 발가벗겨진 것처럼 부끄러웠다. 남편 앞에서 모든 자존심이 박살나는 것 같았다. 내가 부모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해지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남편의 눈에 우리 엄마가 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질지도 두려웠다.


 새삼스럽게 원망이 들었다. 어떻게 결혼식도 치르지 않은 사위 앞에서까지, 잠깐을 참지 못해 이럴 수가 있을까. 하물며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단지 표정이나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노여워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몇 주 전에 직장에 있는 나에게 전화해 그렇게 폭언을 쏟아내 속을 뒤집어 놓았으면서 내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정히 다가오기를 기대했던 것일까? 왜 당신 자신을 향하는 것은 사소한 눈빛과 표정 하나에도 민감하면서 나에게는 잔인할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돌아섰지만 집에 가는 내내 전화와 카톡이 빗발쳤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쏟아지는 엄마의 무차별적인 분노에 몸살이 난 것처럼 열이 오르고 온몸이 아팠다. 결혼하면 엄마로부터 더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엄마는 그걸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불행하기를 힘껏 바라는 사람처럼 더욱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려 애썼다. 숨을 곳도 없는 차 안에서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남편은 옆에서 나를 위로해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부끄러웠다. 그냥 다, 창피했다....




 부모님과의 트러블 때문에 마음이 힘들 때면 부모님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해본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특히 엄마가 이런 식으로 스스로 주체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를 쏟아붓고 나면 나는 살기 위해 그걸 어떻게든 소화해야 했다. 뱀이 제 몸집만 한 먹이를 삼킨 채 소화시키기 위해 몇 달이고 똬리를 틀고 옴짝달싹 않는 것처럼, 돌덩이처럼 얹힌 것을 껴안고 우울과 무기력 속에서 뒤척인다.


 요즘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은 이 문제로 인해 남편과의 사이까지 틀어지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막연히 내가 좋은 가정을 꾸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학대받은 아이가 커서 학대하는 부모가 된다는 말처럼 원가정에서의 어려움은 내 인격의 일부가 되어 내 삶을 지배할 거라는 생각이 언제나 저주처럼 발목을 잡았다. 남편을 만나며 이 사람과는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요즘대로라면 누굴 만나든 나는 결국 모든 걸 망칠 것 같다는 절망적인 생각이 든다. 재밌게 웃고 떠들다가도 엄마의 전화 통에 불쑥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마는 나를 보며 남편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지금이야 괜찮다며 위로해주려고 하지만 같은 상황이 10년, 20년 반복된다면 아마 성인 군자라도 지칠 것이다. 그런 날이 오는 게 두렵다. 자꾸만 엄마가 욱여넣는 이 돌덩이 같은 것들을 어떻게든 깨부수어 소화시키고 싶다.




 부모님은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엄마 스물셋, 아빠 스물다섯 때였다. 결혼하고 바로 이듬해에 나를 낳았으니 친구 부모님들 중에서는 항상 제일 젊은 축이었다. 초등학생 때 우리 아빠 몇 살이다! 싸움에서 항상 졌다.


 부모님은 성격이 서로 비슷하다. 당사자들은 아니라고 할지 모르지만 부부를 가장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다. 평소에는 말 많고 유쾌한 편인 것도, 그러다가도 갑자기 욱하는 다혈질인 것도 쏙 빼닮았다.


 어리고, 서툴고, 불 같은 성격의 두 사람이 이끄는 가정은 마부도 없이 어린 야생마 두 마리가 이끄는 쌍두마차 같았다. 펼쳐진 삶은 울퉁불퉁 비포장도로였고 미친 듯이 흔들리는 짐칸엔 어린 내가 덜렁 실려 있었다.


 부모님은 정말 심하게, 정말 자주 싸웠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많다. 원인은 주로 아빠의 음주였는데, 일단 싸움이 시작되고 나면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자존심 싸움에서 서로를 이기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부모님은 어린 자식 앞에서도 가릴 것이 없었으며 오히려 나를 무기로 쓰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아파트 21층에 살 때였다. 부부싸움 도중 아빠가 나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번쩍 들어서 창밖으로 내밀었다. 아빠에게 당해본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공주님 안기였는데, 이대로 나를 죽여버리겠다고 했다. 엄마가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전혀 듣지 못했다. 아래로 아파트 지상주차장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였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죽은 듯이 얌전히 있어야 마땅했지만 공포에 질린 나머지 사지를 버둥거리며 아파트 단지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초등학교 1-2학년 때였다. 아빠가 다시 나를 베란다 바닥에 사뿐히 내려놓았을 때 하얀 태권도복 바지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날 아빠가 정말 나를 죽일 작정이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빠에게 살해당할 만큼 뭔가 잘못하기에 나는 너무 어렸으며, 아빠가 존속 살해범으로 인생을 놓아버릴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것도 아니었다. 아빠는 단지 그날 승부에서 이기기 위해 더 임팩트 있는 강수를 놓은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미친놈이니 그만 패배를 인정해라, 라는. 대체 부부싸움에서 승리하는 자에게 어떤 명예가 주어지길래 그토록 이기려고 안달이었던 것일까? 둘은 두려워하면서도 싸울 수밖에 없는 숙명을 가진 투견처럼 집이라는 무대에서 매일 같이 혈투를 벌였다. 한 번 시작된 부부싸움은 두 사람이 완전히 지치거나 때로는 경찰이 와야만 겨우 끝이 났다. TV며 화분, 현관에 있는 중문 유리에서부터 변기 뚜껑까지 부서졌고 안방에는 칼자국이 남았다.


 싸움이 끝나고 나면 2막이 시작되었다.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냉전이었다. 어쩌다 나랑 단둘이 남게 되면 부모님은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네 아빠에게 맞아서 이가 흔들린다며 입을 벌려 이를 하나하나 흔들고, 네 엄마가 이랬다면서 옷을 들춰서 살갗의 패인 자국을 하나하나 짚었다. 지금 같았으면 그걸 어쩌자고 나한테 보여주냐고 따졌겠지만 그때는 그럴 수 없었다. 어린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부당한지 아닌지를 절대 판단하지 못한다. 주어진 환경이 세상의 전부이므로.


 어린 나는 둘 사이에서 어찌 반응해야 하는지 몰라 눈치만 보았다. 싸울 때는 그렇게 이기려 들더니 싸움이 끝나면 피해자를 자처하는 모습이 아이러니했다. 어리고 서툴었던 둘은 부모로서의 자각보다는 자신의 고통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둘은 매일 이혼하겠다고 별렀고 실제로 별거를 하기도 했다. 나는 두 어른이 벌이는 싸움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피해자이자 중재자 역할을 하며 자랐다. 대학 때 자취를 하면서 겨우 그 역할을 벗어날 수 있었다.


 가정이란 것은 참 묘하다. 부모님은 결코 나쁜 사람들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 배우자에게, 자기 자식에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아마 당신들도 모를 것 같다. 밖에서는 건실히 사회생활을 하는 부모님이 집에서만은 서로 온갖 추한 모습을 드러냈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의 원가정에서 셋 밖에 되지 않는 식구들은 서로 끝없이 밑바닥을 드러냈다. 밑바닥이란 것은 한 번 실체를 드러내면 그걸로 끝나는 것도 아니어서 파내면 파낼수록 본인도 모르던 더 깊은 바닥이 자꾸 나왔다.




 상담을 다니다 보니 오히려 잊고 지내던 나쁜 기억을 너무 많이 떠올리게 되는 단점도 있다. 좋은 기억은 없었나 곰곰히 생각해본다. 당장 내 마음이 힘들어 까맣게 잊고 지냈을 뿐 떠올려 보면 분명 행복한 기억들도 있었다.


 우리 집은 가족여행을 많이 다녔다. 당연한 것인 줄 알았는데 커보니 그렇지 않은 집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면서도 자주 시간을 내어 휴가를 갔다. 주말이면 근교로 나들이도 자주 다녔다. 어디가 어딘지 다 기억은 못하지만 낡은 차로 전국에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엄마는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엄청난 구두쇠였지만 이상하리만치 여행에는 적극적이었다. 여행지에서의 기억 그 자체보다도, 당신들은 어려서 그런 경험이 없었을 텐데 그럼에도 내게는 좋은 경험을 시켜주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이 사랑으로 와닿는다.


 사람이란 복잡다양해서 말 한 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다. 부모님도 그렇다. 서로 죽일 듯이 미워하고 싸우면서도 부모님은 함께 꾸린 가정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빠는 원형탈모가 올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30년 넘게 한 직장을 다니며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했고 엄마도 출산으로 경력이 단절되었음에도 엄청난 생활력을 바탕으로 '주부 사원 모집' 공고를 찾으며 갖가지 일들을 해왔다. 어려운 시기에도 힘을 합쳐 가정을 건사해냈고 보란듯이 잘 살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 당연한 책임을 져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던가.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이 부모로서, 배우자로서 저질렀던 잘못들은 단지 서투름 때문이었다고 이해하고 싶기도 하다.


 좋았던 기억은 더 있다. 사춘기 시절 주사와 폭력으로 아빠를 증오하기만 했지만 지금 보면 모순적이게도 아빠에게는 놀랍도록 가정적인 면도 많았다. 그 시절 아버지로서는 드물게 아빠는 늘 집안일에 적극적이었고, 나랑 놀아주기도 많이 놀아주었다. 형제자매는 없었지만 덕분에 지루하지 않았다. 아빠는 바다나 계곡으로 놀러 가면 피부가 새카맣게 타도록 나와 물놀이를 했다. 내가 한창 인라인 스케이트에 빠졌을 때는 본인 것도 함께 사서 주말마다 함께 타러 나갔고 자전거나 킥보드도 같이 탔다. 수영장이든 스키장이든 어딜가도 나와 친구처럼 놀아주었다.


 컴퓨터 게임도 많이 했다. 아빠는 열 살 때 내게 디아블로2를 가르쳐주었다. 아빠가 키워준 캐릭터는 제법 강했어서 온라인에서 아빠 또래 유저들을 쩔 해주고 다녔다. 아빠뻘 친구들이 담배 한 대 피고 합시다, 하면 멀뚱멀뚱 앉아서 기다렸다. 친구들과 카트라이더나 크아 대결을 할 때면 아빠가 몰래 플레이해서 이겨주기도 했다. 아빠 때문에 험한 꼴을 그렇게 많이 봤는데도 그렇게 놀았던 기억들만은 별개로 지워지지 않고 남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늘 아빠가 나와 놀아주고 있었다.


 엄마에 관해서는, 사실 조금 어렵다. 아빠와의 갈등(내가 결코 이길 수 없었던 아빠의 술주정)은 내가 따로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 해묵은 것이 되었지만 엄마와의 갈등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니 더 그런 것 같다. 엄마와의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자면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아직 엄마 품안의 자식이던 시절이다. 그때 엄마는 나에게 많은 애정을 주었다.


 동시에 나에게 많이 기대고 의지했다. 아들만 예뻐하는 외할머니 밑에서 자란 엄마는 외할머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찍 결혼했다고 했다. 그렇게 새로 꾸린 가정에서 아빠와도 매일같이 전쟁을 치루었으니 엄마는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자식 밖에 없다고 느꼈을지 모른다. 아마 그래서 내가 조금만 엄마를 거부해도 그토록 과하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다. 그게 지금은 엄마와 거리를 두려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만 엄마의 상황을 생각하면 짠한 마음도 든다.


 상담사 선생님이 했던 말들 중 엄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말이 있다. 시집살이를 하던 며느리가 자기는 나중에 절대 며느리에게 시집살이를 시키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결국 똑같이 대물림 하는 경우가 있다고. 좋은 시어머니가 되겠다던 결심이 진심이 아니어서가 아니고, 참고할 수 있는 좋은 시어머니에 대한 상이 없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엄마가 정확히 그랬던 것 같다. 외할머니와 사이가 나빴던 데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가정을 꾸린 엄마는 엄마의 역할을 전혀 배우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식과의 관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니 내가 마치 당신의 친구인 것처럼, 부모인 것처럼, 남편인 것처럼, 어른인 것처럼 대했다고 지금와서는 생각한다.




 나의 어린 시절은 대체로 불안정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포함한 인생의 힘든 고비들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유쾌한 성격 덕분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닮아 예민하고, 감정 기복이 크고, 우울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인싸 중에 인싸였던 아빠와 친구들 사이에서 항상 말 잘하고 웃기는 포지션이었던 엄마에게서 유쾌함도 물려받았다. 예민함, 우울함, 유쾌함 모두 나의 본성이다. 왠지 불리한 요소가 훨씬 많은 것 같긴 하지만 유쾌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제법 많은 약점을 커버치며 살아가고 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익사할 것 같을 때, 결국에는 언제나 유쾌함이 이겼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글을 쓰고, 상담도 다니고, 울고 불고 하면서 술도 퍼먹다 보면 언젠가는 또 극복할 날이 올 거라고 위안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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