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하는 것을 당한다"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당해야 하는 것을 당한다"
투키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2차 세계대전이 1차 세계대전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은 바로 민간인 사망자다. 1차 세계대전은 전쟁 자체보다 스페인 독감으로 죽어간 사람이 더 많았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특히 1차 대전의 상징인 참호전은 비위생적이고 밀집된 환경 탓에 독감이 번지기에 최적의 조건이었고, 이는 군인과 민간인 모두에게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은 양상이 달랐다.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어갔다. 소련과 중국의 민간인 희생자만 합쳐도 3,0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참혹했다.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로 600만 명이 학살당했고, 그중 절반인 300만이 폴란드계 유대인이었다. 사실 600만이라는 숫자도 거대하지만,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 등을 통해 죽인 중국인의 숫자는 이를 압도한다. 중국이 일본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는 데는 다 그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는 셈이다.
2차 대전 중 한국인 사망자는 약 4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은 전쟁 당사국으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아래 강제징용과 위안부로 끌려가 타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했다.
결국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는 소련과 중국이다. 두 나라는 압도적인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민간인 희생자 비율이 매우 높았다.
미국 역시 비슷하다. 미국의 민간인 사망자는 약 2,000명에 불과하다. 본토에서 죽은 사람은 진주만 공습 당시 60여 명과 일본이 편서풍에 실어 보낸 풍선폭탄으로 희생된 6명 정도가 전부다. 나머지는 대부분 상선 공격에 의한 사망자였다. 미국인들에게도 전쟁은 라디오와 TV로 시청하는 스펙터클이었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하면서 전쟁은 더욱 멀어졌다. 입대하는 청년들이 대개 가난한 계층이다 보니, 중산층 이상의 대중에게 전쟁은 방송으로 관람하는 오락 게임처럼 변해버렸다.
수잔 손택이 지적했듯, 현대의 전쟁은 스크린 너머의 무감각한 이미지가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고대 아테네에서도 발견된다. 민회에서 말을 잘하는 소피스트들은 전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시민들을 선동해 자신의 입지를 키웠다. 젊고 잘생긴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의 풍요로움을 화려하게 묘사하며 정복의 영광을 약속했고, 그 웅변에 취한 아테네는 무모한 침공을 감행했다가 군 대부분이 궤멸하는 참사를 맞았다.
대학 시절 자주 접했던 '군수산업복합체'라는 개념은 단순히 경제적 비중을 넘어선다. 이는 전쟁을 일으켜 무기를 소비하고, 성능을 전시하며 새로운 무기를 판매하는 고도의 전략을 의미한다. 『
미국 민중사』를 쓴 하워드 진은 미국인들이 전쟁 영상에 무감각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라 권력이 의도한 결과라고 보았다. 본토가 안전하다는 지리적 행운과 지배층의 역사 조작이 결합하여, 시민들이 타국의 학살에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번 전쟁에서도 미국은 엄청난 양의 무기를 소비했고, 군수 업체들은 다시 무기를 생산할 막대한 기회를 얻었다. 전쟁이 일상화되면 전쟁 당사국이 아닌 나라들조차 '공포' 때문에 무기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오래전부터 무기 경쟁을 제로섬 게임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 핵무기를 가지면 나도 가져야 하고, 상대가 50만 대군을 유지하면 나도 그에 맞춰 준비해야 한다. 서로 무기가 없다면 쓰지 않아도 될 자원이 끝없이 소비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전쟁 억지력이 절실한 시대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던 날은 단 하루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랑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보노보보다는, 폭력으로 무리를 지배하는 침팬지에 더 가까운 존재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