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 비상등은 늘 머리 위에 있다.
센터는 넓은 회의장이 많았다. 그래서 시스템 에어컨으로 냉난방을 하기보다 공조기를 통해 중앙에서 냉난방을 조절했다. 당시 내가 있던 센터는 흡수식 냉온수기라는 설비를 사용했었는데 냉매를 이용해 물과 열교환을 하는 방식으로 냉난방을 했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중앙공급방식이라 실내온도를 균일하게 맞추기가 조금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회의나 행사가 있을 때면 몰래 회의장에 들어가 체감온도를 느껴보고 외기공기를 좀 더 희석하던가 공급온도를 조절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큰 부분이었다.
북적거리던 사람들이 떠나고 늦게까지 일하던 마지막 직원이 떠난 자리를 확인하면 나의 야간 일이 시작됐다. 제일 위층에 있는 탁구장을 시작으로 지하의 중앙감시실까지 천천히 내려가며 전체 건물을 소등했다. 엘리베이터는 타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상계단의 등까지 소등해야 했기 때문에 지그재그로 계단을 타며 넓은 건물을 여러 번 횡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불 꺼진 층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나를 비춰주는 비상등이 녹색빛을 냈다. 네모난 별도 있나? 초록별도 있나? 별의 모양이나 색깔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마치 비상등은 대양 한가운데에 떠서 북극성을 바라보는 선원의 마음처럼 나의 방향을 인도해주는 듯 했다.
나에게 먼저 다가와서 나의 선을 허물던 제이홍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하지만 시설 경력이 오래 됐고 유난히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는 성격이었다. 제이홍은 나에게 센터에서 지켜야할 관리원들 간의 규칙같은 것을 팁처럼 많이 알려줬다. 그는 박학다식했다. 시계 브랜드나, 외제차의 사양, 일본 전자제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쉴 새없이 말했다. 그는 나의 신상에 대해서도 필요 이상으로 디테일하게 물었지만, 나는 늘 웃음으로 적정선을 지켰고 그런 나의 태도가 그는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리고 그의 기준에 나의 친절함이 과도한 아부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훗날 이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고 인연이 되기도 했다.
내가 입사한 지 한달 정도가 된 시점에 제이홍은 선배를 뵈러 가지고 나를 제촉했다. 한달 정도 휴직을 냈다가 돌아온 선배였다. 물론 정반장과 용선생이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이었지만, 지금 소개시켜주려하는 이 사람을 유난히 신경쓰는 눈치였다. 중앙감시실의 문 앞에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던 제이홍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안으로 들이 밀었다.
헤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진주임님.
그는 진이었다. 진은 머리를 글쩍 거리며 의자에 허리를 한껏 젖히며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하품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편히 쉬어요. 나와 제이홍은 나란히 뒤에 쇼파에 앉았고 진은 의자를 한껏 제낀채 공조기 제어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가 불량한 느낌에 구겨신은 밀레 등산화. 그게 그의 첫 인상이었다.
그 후 나의 일상은 교대근무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슬슬 제이홍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늘 교대근무 순번은 제이홍 다음이 나였는데, 제이홍은 아침 근무시간에 라면을 먹고 튀김 재료를 어질러놓고 요리를 한다던지, 쇼파에 누워 비싼 일본 전자제품을 당직실에 펼쳐놓은 채 잠에 빠져 일어나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사실 그런 것들은 큰 불만이 없었다. 돌이켜보면 지금도 늘 근무시간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익숙하고 아침에 전 근무자의 일을 도와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내 성격이니까. 하지만 제이홍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통제하려 했다. 동료들과 식사시간에 나의 식습관을 문제삼는다던가 고장난 회의장 천장에서 비가 새 천장을 타고 점검하던 날 짜증이 나서 이런 일을 왜 하냐면서 나의 동의를 바라면서도 혼자 누수지점에 물받이 통을 설치하고 내려 오면 밖에서 그가 좋아하는 카라멜 사탕을 먹고 있었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별개였지만 늘 그 자리가 아니라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에게 한 비난이 내 귀에 들려왔다. 별것 아닌 것들이 매일 수십개씩 쌓이다보니 나도 모르게 흠뻑 젖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팀장 사무실에 업무 보고 차 갔을 때였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며 꾸벅 인사하던 것이 제이홍에게는 못마땅해 보였던 것 같았다. 나오는 길에 제이홍은 나를 붙잡고 인사의 이유를 물었다. 인사에도 이유가 있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이홍의 흥분된 말투에 들려오던 단어들이 아직도 기억나질 않는다. 그때 제이홍이 떠나면서 내 발 아래 길다란 전등을 던지자 전등이 깨지며 내 신발을 덮었다. 사소한 일. 다치지 않았지만 나는 다친 것 같았다. 너무 젖은 몸이 버거웠던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늦저녁 나는 당직이었다. 혼자 멍하니 쇼파에 앉아있는 나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진이였다. 무뚝뚝한 사람이 어깨에 기타를 메고 나에게 다가와 슬쩍 내 표정을 바라봤다. 그리고 크래커 하나를 쓱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기타 좀 치고 가려고 남아있었다는 너스레 소리를 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그의 크래커를 한참 보다가 눈물이 흘렀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서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십년을 넘게 같이 서있었다.
진이형은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다. 그는 넓은 사람이 아니라 깊은 사람이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다 챙기기보다 자신이 마음가는 사람을 깊이 품는 사람이었다. 진이형은 당직을 마치고 쉬고 있는 나에게 잠깐 나오라고 했다. 소주에 막창이 끌리는데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나. 그럴리 없었다. 항상 인기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번엔 내 마음을 숨기고 싶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주 두병 정도에 또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했다. 그때는 무엇이 그토록 약했을까. 나중의 이야기지만 진이 형의 행동을 많이 따라하며 점차 나는 변해갔다. 그의 행동보다 그의 생각을 따라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와 헤어지고 타지에서 일하게 되면서 다시 복잡해지게 되는 나는 훗날의 이야기다. 그날 이후 제이홍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꼈다. 아직도 제이홍이 왜 바꼈는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한번씩 진이형에게 그때 일을 묻노라면 그는 늘 웃으며 침묵했다. 어떻게 제이홍에게 나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그의 태도를 교정할 수 있었을까. 그것보다 하나 궁금한 것을 그에게 물었다. 제이홍과 더 오래 지냈는데 어떻게 내 말을 믿을 수 있었어?
너와 대화를 하면서 너의 진심을 믿었거든.
형은 북극성 같았다.
일년 후 제이홍은 회사에서 떠났다. 자의반 타의반이었다. 이런 근무행태를 참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 참는 사람도 유난히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갈 때 차가운 사람들의 눈길이 잊혀지지 않는다. 난 그 후 진이형과 5년 정도를 센터에서 같이 했다. 그리고 여럿 동생들을 만날 때 마다 진이 형처럼 그의 진심을 믿으려 노렸했다. 그가 나의 초록 비상등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