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귀신 이야?"
수많은 4~50대 주부, 아니 그중에도 50대 주부의 방황은 명퇴를 앞둔 이 시대의 아버지보다도 어쩌면 더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남편이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경제적으로 중산층 이상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50대 중반의 K언니. 살림, 골프 치기, 친구 만나기가 그 언니의 일상이다. 자식들도 뭐 크게 속 썩이는 일이 없는 누가 봐도 이 시대의 ‘팔자 좋은 년’이며, 내가 봐도 분명 팔자 좋은 언니임에는 틀림없다. 그런 언니가 왜 원형탈모증이 걸렸을까?
K은행 부지점장을 남편으로 둔 J선배. 결혼 후 경제 활동을 한 적은 없고 그저 해외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유럽에서 수년 생활한 후, 아이들 모두 명문 S대와 E대를 보내고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보상받고 싶단다.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고, 자기만의 ‘의미 있는 그 무엇’을 하고 싶단다. 아무리 찾아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비적인 일뿐, 생산적인 일이 없더란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주식을 시작했다.
결혼 초, 남편의 바람기로 속을 썩이긴 했으나, 기본적인 재산도 많은 50대 후반의 남편은 지금도 큰 규모의 사업을 하고 있는 K언니. 물론 아이들이 욕심만큼 좋은 결과를 보여주지 못해 모임에서 자식 얘기만큼은 큰소리치지 못하지만,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는 발언권 센(?) 아줌마다. 그런 아줌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연락하고 약속을 만든다. 아무 일도 할 게 없단다. 그러면서 ‘나, 시간만 죽이고 사는 사람 같아..’ 그런다.
중산층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내가 가장 사랑하는 L언니. 수년 전부터는 경제적으로 어느 만큼 안정이 되어 그나마 턱밑으로 차오르는 빚은 없지만, 되돌아본 인생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쓸쓸함과 우울함으로 갱년기를 맞고 있다. 지금도 열심히 생활전선에서 뛰고 있는 예쁘고 착한 사람이다.
누구나 겪는 홍역 같은 갱년기가 아니던가. 그 어떤 풍요와 성공을 거둔 들 빈틈없는 가슴을 가진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할까. 나 또한 이사와 해외 거주, 아이들과의 유학 등으로 친구도 많지 않고, 내속을 가감 없이 드러내어 위안받을 지인도 없다. 항상 밝은 나를 보며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사나 보다 하고 생각하겠지만, 하물며 친언니일 지라도, 입 조심하게 되는 성격이기에 가끔 가슴이 먹먹할 만큼 답답하고, 외롭고 허할 때가 있다.
사는 게 뭔지 그저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살게 되고, 그것이 팔자 인양 순응해서 여기까지 온 게 대부분의 우리일 것이다. ‘난 사람’이 아니라고 실패한 인생이라면 너무 잔인한 세상 아닌가.
어제 받은 L언니의 메시지, ‘ 내 인생은 없는 거 같아..’
‘사랑하는 언니.
자기 인생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우리가 ‘귀신’ 인감?? 그저 우리 인생이 가족에게 아내 인생, 엄마 인생으로 묻혀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지금도 많은 시간들이 나를 위해 쓰이기보다 가족을 위해 쓰이기 때문에 가끔 억울하고 속상하고 그러잖아.
하지만 이거 알아?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닌 사람들도, 자기 시간 실컷 즐기면서 허무하다 쓸쓸하다 우울하다고 그러더라.
힘내자 언니.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일수록 ‘자존감’ 찾기는 더 쉬울 거라 생각해. 상황논리에 의해 미뤄졌던 ‘작은 바램’들을 지금부터 하나씩 하면 되지 뭐. 성공한 CEO 가 아니어도, 영향력 있는 위인이 아니어도, 돈에 구애받지 않는 풍요로움이 아니어도 되는,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들을 찾아보자.
나무의 포도가 실 거라고 스스로 위안 같은 거 하지도 말고, 그런 신 포도를 힘들게 따먹으며 사람들에게 달다고 얘기하는 위선도 부리지 말자. 포도를 먹을 수 없으면 먹을 수 없는 거고, 먹었는데 시면 그건 신 거야. 그치?
사랑하는 언니. 찾아보면 ‘나를 위한 기쁨’을 느낄 수 있고 ‘나만을 위한 의미’를 둘 수 있는 뭔가는 있을 거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아니라 뭔가를 하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지 않아? 그렇듯 험한 세상을 견뎌내고 가족과 나를 지켜낸 자신이 정말 대단하지 않아?
3월엔 약속한 데로 바다 보러 가자. 회 한 접시 놓고 소주 한잔 하면서 훌훌 털고, 남은 우리 인생, 진짜 우리 인생 얘기하고 그려보자. 내가 그랬잖아. 누가 버린 농가 하나 멋지게 개조해서 같이 살자고. 응?
내 인생이 왜 없는데?!
여기 이렇게 멋지고 아름다운 여자로 오늘도 씩씩하게 살고 있구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