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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 May 27. 2022

선희와 영미

영미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우리 반으로 전학 온 친구다. 말수가 거의 없고 굉장히 내성적이고 차분한 아이였다. 앞뒤 자리에 앉게 되어 우리는 점심시간에 같이 도시락을 먹으며 친해졌다. 영미에 대한 나의 기억은 매우 단절적이고 부분적이지만, 웃음기가 없던 그 애의 얼굴과 '그날'의 일 만큼은 너무나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날 영미와 나는 하교 후에도 꽤 열심히 놀았던 것 같다. 해 질 녘에 어쩐 이유에선지 나는 영미네 집으로 동행을 했는데, 마침 집 앞에 계셨던 영미의 엄마는 영미를 보자마자 불같이 화를 내며

영미에게 물 한 동이를 퍼부으셨다.

영미의 엄마가 이미 물동이를 들고 계셨던 건지, 그게 구정물인지 뭔지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그 애의 엄마가 영미를 향해 거침없이 물을 퍼붓던 장면과 온몸에 물을 맞아 꼴딱 젖은 영미가 처연하게 서있던 장면만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영미의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보며 나 역시 망부석처럼 서있었던 것 같다.


신기한 것은, 영미에 대한 나의 모든 기억은 그날 그 장면 이후로 완벽하게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그건 아마도 그 이후로 영미는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바로 갔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밑으로 줄줄이 동생을 둔 맏딸 영미의 친구관계는 그렇게 단절될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 시간에 내가 영미네 집으로 동행을 했던 건

아마도 그 애는 여느 때와 달리 늦은 귀가로 엄마에게 혼날 것을 이미 예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친구인 나를 앞세우면 좀 안전할 거라고 예상했던 영미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오히려 친구 앞에서 무참한 꼴을 보이고야 만 것이다.


그때는 나도 어려서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지만, 마흔 살에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불현듯 영미가 생각났고, 그날 자기 친구 앞에서 그 어린 여자애가 받았을 수치심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에서 그날은 잊혀지지 않는 몇 개의 강렬한 장면이기 때문에 나는 이따금씩 영미가 생각나곤 한다. 그 애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너도 지금 오십이 되었을텐데 여전히 사나운 친정엄마 밑에서 여전히 맏딸의 의무를 강요당하고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영미야 너 지금 잘 살고 있는 거지?



선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 되면서 친해졌다. 동네 친구이기도 해서 우리는 서너 명이 참 미친 듯이 어울려 놀았다.

우리의 놀이터는 주로 선희네 집이었는데,

왜냐면 선희도 학교가 파하면 집으로 가야 하는 집순이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선희의 부모님은 동네에서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셨는데, 선희의 엄마는 정말이지 불독처럼 생겨서 친구들도 그 앞에 서면 오금이 저리곤 했다.

그래도 우리가 거의 매일 진을 치고 놀았던 거 보면, 친구들이 집에 와서 떠들고 노는 것 까지는 뭐라 하지 않으셨던 거 같다.


선희는 위로 오빠가 있고 아래로 여동생 둘이 있었는데, 가게일이 바쁜 선희의 부모님은 선희에게 웬만한 가사노동을 맡기고 있었다.

그래서 선희는 초등학교 고학년에 이미 못하는 음식이 없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중학교 때까지 선희네 집에서 선희가 해주는 음식들을 얻어먹는 호사를 누렸는데, 떡볶이는 기본이고 만두와 비빔냉면을 자주 해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웅평이 비행기를 끌고 귀순한 날에는 먹다 말고 놀라 자빠져서 울면서 집으로 갔던 그 한낮의 장면도 선명하다. 어린 맘에 식구들과 이산가족이 될까 봐 불안에 떨며 어린 여자애가 낼 수 있는 최대의 보폭으로 내달렸으니 가랑이가 안찢어진게 다행이다. 어쨌거나 선희는 천성이 밝고 낙천적이라 그런 상황에서도 침통한 내색이 없었고 친구들 관계에서도 주도적이었던 아이다.


십여 년 전에 선희를 한번 만난 적이 있다.

동창들과 우연히 연락이 닿아서 5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김포에 산다는 선희네 집에 가서 차를 한잔씩 마셨다.

선희는 두 아이를 키우며, 남편의 공구상가에서 경리 일도 보며, 여전히 친정 식구들을 건사하며 멀티 플레이하게 살고 있었다. 선희는 여전히 밝고 씩씩해서 보기 좋았다.



우리 엄마 봉례씨는 40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신 후 공장에 다니며 4남매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큰오빠는 일찌감치 돈벌이에 나섰지만 자기 앞가림하는 수준이었고, 나머지 3남매는 모두 학생들이었으니 엄마의 지갑은 늘 빠듯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집안의 셋째였던 나는 꽤 이기적이고 철이 없었다. 당시 어려운 집안 형편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건 바로 우리 집 맏딸이었던 언니였다.


나는 자존심이 너무 센 아이였기 때문에 도시락이 부실해도 징징거렸고, 등록금을 지체해서 교무실에 불려 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공장이 멀어서 새벽같이 출근하셨지만 봉례씨는 언제나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주셨다.


나는 성인이 되고도 한참 후에야  엄마의 고단한 삶을 짐작할 수 있었고, 우리 언니는 번번이 등록금을 못 내서 교무실에 불려 갔다는 것도 아주 뒤늦게 알았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내가 그런 궁핍한 가정환경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 데에는

언니의 희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저 먼저 태어났고 맏딸이라는 이유 만으로 말이다.


내가 좀 덜 이기적이고 좀 일찍 철이 들었더라면 그 희생을 나눌 수 있었을까. 언제나 나에게 밀려 양보만 해야 했던 언니에게 나이가 드니 비로소 미안함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 나는 아픈 봉례씨를 부양하며 언니에게 힘든 티를 가급적 안 내려고 애쓴다. 자식은 다 똑같은 자식인 거지, 장남이고 장녀니까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영미도, 선희도, 우리 언니도 맏딸의 굴레에서 자유롭길 바란다. 대한민국의 모든 맏딸들에게 더 이상 과거의 유산이 답습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의 고유한 본성은 태어난 순서에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인정받고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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