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상담사가 된지 얼마 안되었을때 그를 만났다.
40대 초반, 혼자 사는 미혼 남성이었다.
수더분한 인상, 느릿한 충청도 말씨, 늘 허허실실 웃는 순박한 구직자였다.
담당자로 배정이 된 후, 그는 성실하게 대면 상담에 임했고, 컴퓨터 사용이 능숙하지 않았지만 상담사가 부여하는 과제도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런데, 직업심리검사에서 그는 사회적 지지가 매우 높은데 반해 자존감은 바닥상태로 나타났다.
"선생님! 주변에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부르면 밤이고 낮이고 전부 달려가죠?!
피곤해 죽겠어도 거절 못하고 바로 달려가시죠?!"
내 말에 그는 허허 웃으며
"어떻게 알았대유? 점쟁이구만 점쟁이."
나는 다시 호통을 치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점쟁이는 무슨 점쟁이에요! 검사 결과에 다 나오는데! 선생님 계속 이렇게 살면 그냥 호구 되는 거에요 호구!"
나의 호통에도 그는 또 허허 웃고 만다.
그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남자 요양보호사가 귀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선택과 결정을 적극 지지했다.
내일배움카드를 통해 요양보호사 학원에서 수업에 성실히 참여 했지만 시험은 불합격했다.
"역시 공부는 나랑 안맞아유~"
그는 계획을 바꾸어 우체국 집배원 채용에 도전하겠다고 했다. 나는 또 그의 선택과 결정을 적극 지지하고 격려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우체국 취업 준비를 하겠다고 상담을 마친 그는, 그날 이후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전화기는 수신불가 상태였고, 출석통지서는 번번히 반송되었다.
절차에 의해 프로그램 참여를 강제 중단처리하고 그남자는 내게서 까마득하게 잊혀져 갔다.
그로부터 1년쯤 후에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1년만에 전해진 그의 소식은 본부의 감사 기간에 하달된 사망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그제서야 왜 그의 전화기가 꺼졌고, 왜 우편물이 자꾸 되돌아왔는지 이해가 된 것이다.
동거가족도 없어서 누구 하나 내게 그의 죽음을 대신 전해주지도 못했다.
별다른 지병도 없었고 건강상 문제가 없었던 그가 대체 왜? 왜?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는 편이 못되지만 나는 그의 얼굴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말끝마다 어떻게 알았대유, 어떻게 알았대유 하던 능청스러운 표정도.
그래서 그의 사망을 알게 된 날, 하루종일 충격에 휩싸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도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구직자 중 한명이다.
그가 생각날 때면 나는 늘 똑같은 질문을 뇌까린다.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