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생 봉례씨는 아침마다 너무 바쁘다.
아침이면 남편이 제일 먼저 알아서 출근하고,
그 다음에 나와 딸이 출근 준비를 한다.
어느 집이나 정신없는 아침 풍경이지만,
우리집에서 아침에 젤루 바쁜 사람이 정작 팔순 노인이라니 이를 어찌할꼬.
봉례씨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제일 먼저 가스렌지에 불을 켜고 달걀을 삶는다.
내가 씻고 나올 때쯤 잘 삶아진 달걀의 껍질을 벗기고, 사과 한 알을 깎고, 체다치즈 한 장을 앞접시에 세팅한다. 작은 오봉에 정갈하게 준비해주시는 엄마와 나의 아침 루틴이다.
나는 이렇게 잘 챙겨주시는 봉례씨 덕분에
국가건강검진에서 영양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검사 결과를 전해 듣고 봉례씨는 낄낄 웃었지만 얼굴에는 뿌듯함이 넘쳤다.
봉례씨의 아침 일과는 이게 끝이 아니다.
내가 사과를 우적우적 씹으며 화장을 하고 있으면,
아직 딸아이가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헤어드라이기와 고대기를 꺼내어 콘센트에 연결하신다. 이제부터 진짜 봉비서의 일과가 시작되는 것이다.
봉례씨는 일단 손녀를 깨워야 한다.
그 아이의 아이폰에서 아침 7시부터 알람이 울려대지만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대체 처듣지도 못하는 알람은 왜 그렇게 주구장창 설정해놓는 것이냐? 알람 소음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는 온전히 나와 봉례씨의 몫이다.
몇분 간격으로 계속 울려대는 알람소리에
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화장을 하는 동안에도 봉례씨는 평온하게 손녀를 깨운다.
물론 그 아이는 한번에 일어나는 법이 없다.
드럽게 안일어나는 애를 깨우려다 나는 성격파탄자가 될 뻔했는데 결국 우리집에서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봉례씨 뿐이었던 거다. 그렇게 손녀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등교를 책임져온 봉례씨가 지금까지도 손녀의 출근을 책임지고 있다.
봉례씨는 전날 미리 타서 시원하게 냉장시킨 카누 원두커피를 손녀에게 대령한다. 한 모금 깨작 마시고서야 비로소 침대에서 기어 나온다.
회사에 30분 전에 도착해도 시원찮을 판에,
30분 전에 일어나서 기적의 출근 준비를 하는 손녀 때문에 봉례씨는 좌불안석이다.
손녀가 얼굴에 찍어바르는 동안 봉례씨는 드라이기로 치렁한 긴머리를 말려 주신다.
사과를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어주고 한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가 닳으신다.
"할머니, 나 저거 좀 갖다주면 안돼?"
손녀의 갖가지 요구에 몸을 날리신다.
인간 시계가 되어 손녀에게 시간을 계속 주입시키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
손녀에게 지극한 봉례씨를 보며,
이렇듯 하염없는 사랑을 경험하는 딸이 늘 부럽다.
나에게는 유일하게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지만, 그분의 표정은 항상 차가웠고,
심지어 이모네 아이들과 우리를 차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조부모의 사랑에 대한 경험치가 없고,
그 느낌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 해도 내 딸이 넘치게 받는 할머니의 사랑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행복하다.
딸아이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파고를 만나도, 이 충만한 사랑의 기억으로 단단히 견디어낼 것을 나는 안다.
이 대체불가한 사랑의 크기를 진정으로 깨닫는 날,
너는 아마도 봉례씨가 미치게 그리워서 서럽게 통곡을 해댈지도 몰라. 그러니 이넘 기지배, 아침에 발딱 좀 일어나라고.
오늘 아침에는 봉례씨가 헤어기기 꺼내 놓는 것을 깜박 했다.
"어허, 봉비서 안되겠네 안되겠어!"
할머니에게 너스레를 떠는 딸의 한마디에
세 여자가 아침 댓바람부터 까르르 웃는다.
봉비서가 있어서, 우리의 아침은 언제나 활기차고 유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