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차. 걸음마를 떼지 못하는 아기
게으름뱅이던 내가 의외로 꾸준히 약을 챙겨 먹고 있다.
하지만 어쩐지 자려고 누울 때마다 왼쪽 가슴이 시리고 화한 느낌이 난다.
타들어가는 듯한 느낌이기도 하고 자려고 누우면 증상은 계속 반복이다.
너무 무서워서 인터넷에 넘쳐나는 의학 지식들을 매일 밤 찾아봤다.
다양한 원인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래서 어느 병원을 가봐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증상의 원인으로는 역류성 식도염, 위염, 스트레스, 기흉, 심근경색 등이 나온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병명들이다. 괜히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
약을 먹는 마지막 날 약 때문은 아닌가 싶어 약을 먹지 않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 날 밤 밤 잠을 설치며 일주일 중 가장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오전 진료를 노렸지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역시나 실패.
괜찮다.
병원에 다시 가보려고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반절의 성공이다.
오후 늦게 집을 나섰다.
꾸준히 약을 챙겨 먹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의사 선생님 앞이다.
지난주는 처음이라 분위기도 어색했고, 마음의 준비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족한 상태였다. 낯가림도 심한 편이라 시선처리도 엉망인 데다
우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그렇게 울면서 받은 상담이 너무 아쉬워서 이번주는 준비를 단단히 해갔다.
초조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꽤 잘했다.
오늘은 휴대폰 메모장에 메모해 간 것들을 하나씩 꺼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정답은 없고, 결국 내가 하나씩 해결해 나갈 거라는 답변들이 돌아왔다.
나 역시 답을 찾거나 조언을 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지금 내 상황과 감정을 설명하면서 적절한 처방이 내려지길 기대한다.
- 며칠 전부터 심장? 가슴? 아픔? 화한 느낌 같은 것들이 계속 돼요. 자려고 눕기만 하면요.
- 약 때문인가 싶어서 어제 약을 안 먹고 잤는데 제일 심했어요. 잠도 제대로 못 잤고요.
- 걱정이 돼서 찾아보니 심근경색이다, 유방 문제다, 심장혈관 문제다 별별 병명이 많았고요.
-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기도 하던데 혹시 뭐 때문에 그럴까요?
-> (웃음)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병원 검사를 받아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나올 걸요?
어떻게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단 번에 말씀하시지 정말 신기하다.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나니 정말 너무 다행스러웠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스트레스가 심했나.
가족들 모르게 병원을 다녀오고, 매일 밤 숨어서 약을 먹는 게 스트레스였을 수 있겠다.
친구의 취업 소식에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진심으로 축하해 줬는데... 스트레스라기보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이 마저도 스트레스다.
그냥 내가 스트레스가 심했구나. 그러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진정하자.
신기하게도 이 날 진단 이후 자기 전 통증은 말끔히 사라졌다.
- 제가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지? 진짜 문제가 있는 게 맞는지? 계속 생각하게 돼요.
- 괜찮은 것 같은데 분명 괜찮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요.
-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몇 가지 적어왔는데요. 어떤가요?
-> 걸음마를 걸어야 할 때 걷지 못하는 아기는 분명 걱정스럽죠. 나중에 문제가 발생하게 돼요.
-> 그 나이때 해야 할 일들이 있고, 보통 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 동글 씨 나이에는 일을 한다던지 뭔가를 하는 것, 생산적인 활동을 해요.
-> 근데 지금 그걸 못하고 있으니 문제가 발생한 거고, 나중에도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죠.
->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으니 생각과 걱정이 이어지고 불안이 생겨요.
-> 벌써 그 자체로도 문제가 돼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걸음마를 걸어야 할 아기.
만약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하지 못하면 엄청난 걱정이 몰려올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생각을 못했지?
살아 있다고 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버티고 있다고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나는 변화하길 원하고, 이 무기력한 삶을 끊어내길 원한다.
늦었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병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크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다행히 나는 내 병을 인지하고, 잘 알고 있다고 하니 조금 힘이 난다.
완벽주의 강박이 심하니 나를 자꾸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두 번째 진료가 끝이 났다.
14분의 진료 시간.
서로 대화가 오가는 상담을 기초로 한 진료를 마쳤다.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할 수는 없는데 준비를 너무 많이 해갔다.
중간에는 준비해 간 말을 다 못 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초조하기도 했다.
초조해하지 말자. 다음 주에 또 물어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자.
이번주엔 약도 늘리기로 했다.
이렇게 진짜 우울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2회차. 걸음마를 떼지 못하는 아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