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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4 '우울증 치료 일지' 3회차.

3회차. 난 아직 엄마가 필요해

벌써 3회차 진료날이 다가왔다.

마음은 먹었는데 정작 집을 나서는 일이 쉽지 않다.

엄마가 자는 동안 나갈까 대기하고 있었는데 어쩐 일로 

오늘은 잠도 안 자고 빨래하고, 책 보고, 밥 먹고 바쁘다.

엄마 모르게 나가고 싶은데... 

미적거리면서 타이밍만 보고 있다가 커피를 사 오겠다며 드디어 나왔다.




3시 병원 도착.

7명이 대기하고 있다.

항상 새로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정말 다들 살기가 팍팍한가 보다.

그래도 두 번 와봤다고 꽤 여유로운 대기다.

지난주보다 사람은 없었는데 조금 더 기다렸다.




12분의 진료.

약을 또 늘렸다. 신경은 쓰이지만 이렇게 맞는 정도와 약을 찾아가고 있는 거라고 믿는다.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다 나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니 바보 같다.

병이 아닌 의지박약이라고 나를 몰아세웠는데 갈수록 약이 늘어나는 걸 보니

정말 정상은 아닌가 보다. 


- 게으름과 무기력의 차이는 뭔가요?

- 제가 지금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건지 무기력한 상태인 건지 모르겠어요.

-> 병의 증상이죠.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없었는데, 잘 지냈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는 거죠.

-> 일정한 패턴을 보였던 사람이 어느 시점부터 그러지 못하는 걸 증상이라고 봐요.


- 약은 꼭 일주일치만 받을 수 있나요?

-> 2주까지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어느 정도 괜찮아졌을 때 가능합니다.


- 괜찮은 것 같은데 안 괜찮아요. 우울과 불안이 몸에 쫙 퍼지는 느낌이 들고 생산적인 활동을 전혀 못해요.

-> 우울감이 심하면 좋은 기분이 안 느껴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괜찮은 점은 감정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 지금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우울증 약과 생각을 줄일 수 있는 약, 강박과 불필요한 신경성 완화, 압박감을 줄여줄 수 있는 약을 처방해 드릴게요.

-> 좋은 척, 괜찮은 척하는 것은 진료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니 의심하지 말고 진료받으러 오세요.


어쩜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신 것 같지?

괜찮은 것 같고, 다 나은 것 같다던 감정들은 사실 진료를 부정하기 위함이었다.

아닌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으로 진료를 거부하려 한 것이다.

빨리 나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변화할 준비를 했다면 이렇게까지 늦진 않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인정하고 꾸준히 치료를 받아보자.

한층 더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텐퍼센트의 아이스 바닐라라테를 사들고 집으로 가는 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 탓에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엄마는 진짜 어디 갔다 왔는지

물어보지를 않는다. 신기하다. 어쩜 그러지? 물어봐도 어떻게 말할까 고민이지만...

지금은 나도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약봉지는 오늘도 하나 둘 서랍 안에 쌓여가고 있다.

이걸 몰래 버리는 게 관건이다. 뭐 언젠가는 버릴 수 있겠지.





엄마랑 티타임을 가지며 이런저런 얘기 중.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타이밍을 계속 보고 있는데 계속 놓친다.

말을 하고 싶나 봐... 근데 타이밍을 또 놓쳤어.

한참을 대화하는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못 하고 매번 똑같은 얘기만 반복이다.

대학원 못 간 얘기, 억울하다는 하소연, 아무 쓸모없는 과거 얘기만 반복.

엄마 속상할 얘기만 반복. 또 반복. 이게 아닌데...

밥 먹으면서 얘기할까? 그럼 밥도 못 먹고 체하려나.

밥 먹고 나서 얘기할까? 그래도 밥 먹은 게 체하려나.

갑자기 말할 타이밍을 보고 있다니 내가 왜 이러지?


엄마랑 매콤한 순살아귀찜을 먹기로 결정하고 주문을 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오늘 추가된 약이 뭔지 찾아보는데 거기서 애써 다잡았던 마음이 무너졌다.

정말 놀랐다. 약이라는 게 딱 한 가지 성분이나 효과만을 갖고 있진 않고,

비슷한 성격의 병들을 이것저것 치료하는 건 알지만 '조현병'이라는 단어는 차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조현병과 우울증 보조 중에 어떤 목적일까? 둘 다인 걸까? 너무 놀라서 갑자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신분열증이라고도 하는데 내가 평소에 정신분열증 오겠다고 말하던 그 정신분열증이 맞나?

맞아. 소름 끼쳐. 나 진짜 제정신 아닌 사람인가 봐.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못 치우고, 못 씻고, 무언가를 못 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조현병 초기 증상으로 본다는 글을 발견했다.

아... 그럼 나 맞는데... 순간 엄마한테 예고도 없이 툭 이야기를 꺼내버렸다.


상상 속의 나는 엄청 담담하게 잘 말할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왜 그랬지. 왜 갑자기 말했지. 나도 사실 그게 엄청 감당하기 무겁고 무서웠나 보다.

엄마가 아니면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 말할 곳이라고는 없는데

나는 엄마를 슬프게 하긴 싫으면서도 엄마한테만이라도 말하고 싶었던가보다.

처음에 가만히 듣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예상 못한 엄마의 반응에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오히려 나는 울지도 못하고, 엄마가 정말 서럽게 울었다.

난 그냥 내 상태를 설명하고 싶었을 뿐인데 엄마가 생각보다 너무 심하게 반응해서

엄마를 달래기에 급급했다.

나도 위로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엄마는 왜 펑펑 울고 그래...

정말 속상하다. 아픈 것도 속상한데 엄마한테 이런 모습 보여서 더 속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한테 말해야 했던 딸이라 정말 미안하다.


엄마는 내가 바람을 쐬러 혼자 나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말하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 기다렸다고.

저녁마다 물컵을 들고 들어가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울었다.

엄마가 미안할 일이 아니잖아.

내가 미안하지.

나이가 들어서도 어리광 피우고 싶어서 미안해.

한평생 사랑으로 키워준 엄마에게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해.

아직도 엄마가 필요해서 미안해.


둘이 펑펑 눈물을 쏟아내고 진정한 뒤 상태를 진지하게 말했다.

솔직히 좋은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

내가 지금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잖아.

왜 그런지 알고나 싶었고, 의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병원에 가게 된 거야.

약을 먹어서라도 떨쳐내고 싶었던 거라고.

엄마는 가슴이 찢어지겠지만 이건 잘 지내보자는 거니까 희망적인 일임은 분명해.

더 많은 시간을 우울하게 날릴 뻔했으니까.

다 괜찮아지고 나서 말하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괜찮아지지가 않고,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동안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매번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하고 나가버리는 것도

우리 집 분위기랑 맞지도 않잖아.

약봉지 어떻게 버려야 할지 몰라서 모아두는 것도 웃기고.

난 그냥 말하고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 엄마가 크게 반응했어.

그 정도로 심각한 건 아니야.

난 죽고 싶거나 죽을 생각은 없어.

이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고, 다짐 같은 거야.


엄마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엄마는 이 세상 나의 하나뿐인 유일한 친구니까.

언제든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엄마도 초조해하지 말고 신경 쓰지 말기를...

더 나은 미래의 나를 기다려주기를...

미안해 엄마. 정말 미안해.

다 큰 척, 씩씩한 척해보려고 해도

난 아직 엄마가 필요한가 봐.




우리의 눈물은 아빠가 귀가하면서 끝이 났다.

눈치 없는 아빠는 우리가 펑펑 운 것을 알아채지 못했고,

셋이서 늦은 저녁으로 순살 아귀찜을 맛있게 먹었다.

가끔은 단순하고 눈치 없는 아빠가 좋다.


엄마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1시 40분이 넘어서야

각자 방으로 들어가며 오늘 하루 마무리.

정말이지 힘들고 긴 하루였다.

하지만 어쩐지 후련해진 마음에 편히 잘 수 있는 밤이다.


3회차. 난 아직 엄마가 필요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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