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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글이 Oct 21. 2023

#2 '우울증 치료 일지' 1회차.

1회차. 정신건강의학과 첫 방문

드디어 디데이다.

오늘은 아무도 모르게 병원에 갈 예정이다.

차마 가족들한테 이야기할 수 없었다. 혼자 조용히 다녀와야지.

일찍 일어나 오전에 병원에 가야지 다짐했건만 역시나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마음먹었다고 해서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니니라.


햇살이 내리쬐는 2시쯤 집을 나섰다.

오래간만에 나가는 외출이라 발걸음은 어색했고, 

주위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모자와 안경을 썼다.


정신건강의학과가 있는 건물에는 내과, 피부과 등 다른 종목의 병원들이 

함께 있었다. 어쩐지 위안이 되어 안심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어떤 여성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같은 층이다.

두근두근 저 사람도 정신과에 왔구나... 나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또다시 위안이 된다. 다들 그렇게 찾아오는구나, 나도 잘 찾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카운터로 간다.

접수를 위해 신분증을 확인하고 최초 등록을 했다. 

이어서 꽤 많은 양의 설문지를 받아 들고 

아주 푹신하고 편안한 1인용 의자에 앉았다.


오늘 오후 진료는 여자 선생님만 하는 날이라는데 사람이 7명이나 기다리고 있다.

남녀노소 연령대가 너무 다양해 신기했고, 나도 모르게 자꾸 사람들을 관찰하게 된다.


설문지를 무려 20분 동안이나 작성했다. 이게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인터넷에 떠돌던 자가진단 테스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문항이 많고 아주 상세하다. 어려웠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 정도면 심한 수준인지 아닌지가 너무 애매하고, 자체적으로 그 정도를 측정하기가 

어려워 한참을 고민했다. 이것도 나름 스트레스였다고나 할까...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진 덕분에 진정하고 천천히 작성해서 제출했다. 딱 20분이 걸렸다.


고요한 공간에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조용히 앉아서 기다리는데 궁금증 투성이다.

상담 없이 약만 처방받아서 가는 사람들도 있었고, 상상도 못 한 나이대의 할머니들도 계셨다.

병원 내에 약 제조실이 따로 있어 약국에 따로 갈 필요가 없다. 다행이다.

약국에서 괜히 쭈뼛거리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이 계속 와서 어쩐지 더 긴장이 되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마주해 부담스러웠다.

그러고 있는 사이 내 차례가 왔다.


아늑한 방에 따뜻한 느낌을 주는 여자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너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은은한 텐션으로 말이다.

입을 떼자마자 눈물이 났다.

나름대로 준비해 간 말이 있었는데, 눈물은 내 계획에 없었는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막막해져 순식간에 상담은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눈물은 멈추지 않고 말은 장황해져서 다 하지도 못했다.

정확히 15분. 첫 번째 상담이 순식간에 끝났다.


정신없는 나와 달리 선생님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다음 주에 또 와야 한다'라고.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천천히 이야기해 보자'라고.

우울증이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상태에 무기력증도 심해서

항우울증과 신경성 치료제를 먹어보기로 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말을 듣는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기보다는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는 게 슬프다.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면 나의 지난 5년을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그게 두려웠던 거다. 내가 아파서 그랬다는 핑계를 대고 싶었는데,

그 이상으로 정말 상태가 안 좋단다. 슬퍼도 다행이다.

한 번에 다 할 수는 없고, 하나씩 해보자고 하셨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의 나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었다.

나는 5년을 묵혀 뒀던 감정을 한 번의 상담에 다 쏟아 내려했고,

그 결과 당연히 실패했다.

횡설수설 망쳐버린 상담이 너무 아깝고 아쉬워서 자책도 많이 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됐다.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다음번에 와서 해도 되는데,

스스로 마음을 너무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너무 생각이 많고, 불안이 많아서 줄여나가야 한다는 처방이 내려졌다.

일주일 동안 약을 잘 챙겨 먹고, 올바른 생활 리듬을 만들어보기로 약속했다.


첫 번째 상담을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싶다면 먼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병원에 가서 설문지를 작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치로 나타나는 것들이

기본적인 자료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 후 면담을 할 때 필요한 것은 최근에 느낀 나의 감정, 상태, 기분 등을

말하는 것이다. 오래도록 내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 혹은 고민거리들 보다는

최근에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말하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된다.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생각은 접어두는 것이 좋다.

시간을 두고 차근히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훨씬 편안한 상담이 될 것이다.


초진은 진료비가 조금 더 나온다며 안내해 주시는데 

2만 원이 조금 넘는 진료비를 계산했다.

생각보다 큰 금액은 아니다.

막상 겪어보니 별 거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늦게 찾아온 걸까.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라 다행인 정신건강의학과 첫 방문이다.


1회차. 정신건강의학과 첫 방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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