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의 기록

망가진 삶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by HS

정신을 차려보니 내 삶은 망가져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시체처럼 방구석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이 흘러가는 걸 지켜볼 뿐이었다.

묘하게도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하는 것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눈 깜빡할 사이에 하루가 끝났으니까.


왜 사람들이 방구석에 박혀있으면 다신 못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그저 숨을 쉬고, 뱉는 하나의 기계처럼 정해진 동작대로 움직이고 멈추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대로 무언가를 시작해보고자 하는 의지조차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많이 했던 짓은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었다.

"이땐 즐거웠는데.."

"그래도 희망이 있었는데.."

"힘들었지만 잘 이겨냈는데.."


아무리 과거로 도망치고 싶어도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우는 게 고작.

예전 같으면 가슴 깊이 박혔을 욕설도, 차갑게만 느껴졌을 무시하는 태도도 아무렇지 않아 졌다.

엄마가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개가 짖는 것 같은,

딱 그 느낌이었다.


항상 느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가고 몸은 점점 무기력해졌다.

현실은 매일 똑같은 지옥이었고, 꿈마저도 어둡고 무서운 꿈만을 꾸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에서 주인공이 일기를 쓰기 시작하는 걸 보았다.

나는 무작정 일하던 편의점 구석에서 작은 노트와 볼펜을 샀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했다.


"뭘 쓰지..?

내가 아는 일기는 하루의 일과를 정리해 글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하루는 보잘것없었다.

이대로면 어찌어찌 일기를 쓰더라도 매일이 같은 내용이 되어버린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꿈의 파편들.

"이거라도 쓸까"

나는 일기를 쓸 때의 규칙을 정했다.

첫 번째. 매일 쓸 것. 그날이 끝나가는 시점에 바로 쓰자. 만약 못 썼다면 다음 날에라도..


두 번째. 부끄러우니까 나만 알아볼 수 있게 하자. 그래서 떠올린 건 고등학교 때 잠깐 배웠던 일본어였다.

제대로 기억조차 나질 않았지만 어떻게든 썼다. 세 번째. 이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쓰는 내용은 나만 알기로 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면서

이 규칙은 애매해졌다.


첫날 일기장에 나는 무작정 썼다.

"오늘부터 일기를 쓸게요.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날 있었던 일도, 꿨던 꿈도, 했던 생각도

아무거나 쓸 겁니다."

지금 다시 펼쳐보면 끔찍한 글씨다.

헷갈려서 몇 번이고 썼다가 줄을 긋고 다시 쓴 흔적들. 제각각의 글씨 크기와 삐뚤빼뚤한 줄.

사실 지금도 크게 좋아지진 않았지만 이때의 일기는 나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지금도 가끔 펼쳐본다. 1년 전의 기억들을.

끔찍한 내용의 꿈은 많았다. 너무나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지만 나는 안다.

난 그때 즐거웠다.

무서운 꿈을 꾸고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땀에 범벅이 되어 깨어나면서 내가 한 건

옆에 놓인 약을 물과 함께 벌컥벌컥 삼키고, 바로 볼펜과 노트를 집어 들어 글을 썼었다.


그 공포감을, 불안함을, 쾌감을, 슬픔을, 분노를, 전부 생생했던 꿈과 함께 볼펜으로 노트에 쳐 박아 넣었다.

어떤 날은 졸려서 대충 적어놓기도 하고, 어떤 날은 꿈을 꾸었지만 기억하지 못해서 고뇌하는 일기를

나는 계속해서 썼다.


하지만 늘 꿈을 꾸는 것은 아니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땐 일주일에 대부분 꿈을 꿨다면, 날이 지날수록

꿈을 꾸는 빈도는 줄어갔다.

나는 하루를 유심히 지켜보며 지냈다.

내가 어딜 걸었는지, 무얼 봤는지, 뭘 했고, 무엇을 당했는지

그때의 감정과 생각을 기억하려 했다.

그리곤 바로 일기를 쓰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료했던 삶에 게임보다도 즐거운 취미가 생겼다.

하루가 기대되고, 어떤 생각을 할지, 어떤 감정을 느낄지, 어떤 꿈을 꾸게 될지 설레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의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어떤 날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따뜻한 행복을 느끼고,

또 다른 날엔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아마 내가 매일같이 일기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한가한 사람이라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실제로 바쁜 날엔 일기를 까먹기도 했으니까.

난 그래서 감사했다.

한심하다고만 생각했던 인생이, 일기를 쓰며 즐거움을 찾아주는 감사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는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 누군가에게 보여주어선 안될 만큼 부끄러운 이야기가 적힌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일기를 읽는다면 내 정신상태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 대단한 내용은 없다.

주로 내 삶에 대한 한탄이나, 싫어하는 사람에게 가진 혐오감을 드러내는 글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써서 그런 것일까?

묘하게 생생하다. 글씨를 보면 무슨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다.

졸려서 손에 힘이 덜 들어가 희미한 글씨

빨리 써버리고 자고 싶어 대충 휘갈겨 쓴 글씨

그중에 가장 티가 나는 건

강한 감정에 휩싸여 일기장과 볼펜을 부숴버릴 듯 글을 쥐어짜 낸 글씨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인생이 갑자기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일기를 좋아하는 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조금 틀어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똑같은 일상도, 내가 쓰는 글에 따라 다른 날이 되었다.


괴롭고 버티기 힘든 일들도 일기를 쓰기 전엔 그저 한탄만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이젠 어떤 식으로 써야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내가 있다.


오늘 밤은 일기장에 어떤 감정으로 하얀 종이 속을 채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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