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첫인사의 전통

암환자 그를 사랑하는 아내

by 본비 은혜

그가 어제는 꽤 괜찮았다.

오랜 시간 깨어서 나랑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 번째 복수로 2.5l를 뺐다. 그리고 어렵게 화장실도 걸어서 갔다.

일주일이 넘도록 화장실을 못 가, 약을 처방받았다.

매일, 매 끼니때마다 먹는 변비약은 설탕물이라고 달기만 엄청 달다고 그가 말하는 약은 효과가 전혀 없어,

독해서 투약 횟수를 제한하는 변비약을 이삼일 먹고 겨우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가 걸어서 화장실을 가는 것을 일주일 만에 봤나?

" 여보, 이렇게 걸어서 화장실을 가고, 이렇게 병실을 두 번쯤 걷고, 복도를 걷다 보면, 집에 갈 수도 있어."

힘겹게 화장실에 다녀온 그에게 또 희망을 부여잡는다.

조금만 서 있으면, 조금만 걸으면 가능성을 기대한다. 나는.

그런데, 그게 힘들었을까? 다시 숨이 안 쉬어진다고 어젯밤에 꽤 힘들었다.


단맛을 지나치게 느껴서 새콤한 것만 찾는다. 아침에 유자주스를 반잔 마셨다.

아침에 깨어 있는 게 그냥 기뻤다.

귀 밝은 소머즈처럼, 냄새 맡는 것이 엄청 난 그는 나에게 아침부터 씻으라고 종용을 한다.

장난 꾸러기처럼 나는 입 냄새를 일부러 '화~ '해주고 냅다 화장실로 가서 씻고, 로션과 선크림을 바르면서 혼자 생각을 했다.

'오늘 누가 오려나? 일찍부터 씻고, 뭔 일이지? 나 오늘 이뻐 보이네.'


내가 로션을 바르니, 그는 출근하냐면서 불안해한다.

"출근 안 해~ 그냥 바르는 거야."

잠시도 없으면 나를 찾는 그는 아기가 되었다. 그러니 내가 어딜 갈 수 있나.


아침에 둘째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자 친구를 인사시키고 싶다고.

병실로 인사 오는 것을 꽤 망설였던 딸은, 갈수록 나빠지는 아빠의 상황에 결정을 했는가 보다.

그래도 아빠의 면접을 꼭 보고 더 사귈지를 고민해 봐야겠다고.

더 좋은 환경에서 첫인사를 받고 싶었지만, 남자친구의 회사 일정이 바빠지면서 앞으로 시간이 어찌 될 수 없으니, 오늘 휴가 쓴 김에 인사하고 싶다고.

그래, 언제 좋아질 수 있을지 알 수없고, 제대로 알아볼 때 보는 것도 좋겠지.

어쩐지 아침 일찍 화장을 하고 싶더라니.


아주 오래전,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대학생 언니와 방에서 나눈 대화가 참 또렷하게 오늘까지도 기억이 난다.

둘 다 남자친구도 없던 시절에, 미래 우리의 남편에 대한 얘기를 나눴었다.


" 언니, 나는 일단 키가 커야겠어. 아빠처럼 작은 건 좀 싫고, 아빠처럼 살집은 좋아. 그리고 아빠처럼 사업하는 사람은 싫어. 돈이 많다가 없다가, 엄마가 힘들어하는 거 싫더라. 그래서 난 안정적인 직장인이면 좋겠어. 그리고 집은 있어야 하는데, 땅은 없으면 좋겠어. 땅이 많아서 엄마가 맨날 일하는 거 싫어. 일꾼들 챙기는 것도 힘들잖아. 그냥, 집이 있고 키가 크고 둥글둥글한 월급쟁이면 좋겠어! 언니는?"

아빠는 영문 없이 끌려와 비교를 당했다.

성격이 끝내주는 우리 아빤데.


" 야! 집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니? 사람이 생각이 맞아야지. 가치관이 맞아야지! 나는 키는 좀 커야겠고, 살집은 별로야. 그리고 월급쟁인... 꼭 돈 보고 결혼하는 거 같잖아. 그게 뭐가 중요하니?"


우린 사춘기 애들처럼 그렇게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말은 그대로 씨가 되었고, 딱! 그렇게 만났다.

남편은 논 밭이 많은 여주에 달랑 집 하나만 있는 키 큰 월급쟁이다. 먹는 것을 좋아해 몸집은 둥글둥글했다.

언니는 키가 크고 마른 목회자를 만났다.

가치관대로 그들은 집 욕심 없이, 오직 주님만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배우자에 대한 기준이 하나 있었다.

교제가 시작될 때, 꼭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교제를 하겠다는 것이다.

내 눈에만 좋은 게 아니라 부모님의, 어른의 눈으로 봤을 때 인정받는 사람과 결혼하리라 하는 굳은 마음이었다.

따로 나와 살던 때에, 방에 도배를 핑계로 엄마와 아빠, 그이를 다 불렀다.

자연스럽게 면접이 시작되었고,

아빠는 내게 엄지 척을 해주시면서 교제를 허락하셨고, 엄마도 마음에 들어 하셨다.

단지 부모님이 연로하신 것과 늦둥이 외아들이라는 게 마음 쓰이셨지만 흡족해하셨다.

부모님의 허락을 맡고 나서야,

그는 아버지께서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신데, 아들의 여자친구를 너무 궁금해하신다고 해서 추운 겨울에 병실로 인사를 갔었다.

오십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니 얼마나 궁금하셨을까?

그날 병원을 들러 집으로 어머니께도 인사를 갔었다.

그 첫 만남의 어머님이 떠오른다. 환한 안방에서 환하게 맞아주신 어머니가 생각난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첫인사도 전통인가?

참 쓸데없는, 끊어져야 할 전통이다.

큰 딸에도 급하게 병실로 인사를 왔었다.

우리 아이들도 나처럼 우리의 면접을 통과해야 교제를 하겠다고 했었다.

첫인상은 3초 컷이라고. 아니 0.3초라고 하던가?

첫인사의 후한 점수를 주고, 나중에 집으로 정식 초대를 했었다.

모두들 깨끗하고 정갈하게 준비를 해서 제대로 만났다.


오늘 둘째 딸도 병실로 첫인사를 온다니, 참! 얄궂은 전통이다.

그이가 어제처럼 컨디션이 좋기를 바라는데, 오전부터 정신없이 잔다.

둘째 딸은 고민을 하며, 다음으로 미룰까 하는데.

다음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기에,

그냥 밀어붙인다.


아빠가 사랑하는 둘째 딸인데, 제대로 봐주시겠지.

우리는 '괜찮다. 계속 만나봐'라고 하기를 바란다.

아직 시작이라고 하지만, 소개를 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일 테니.

그걸 어떻게 떼어 놓을 수 있을까?


오후에 첫 대면을 기다리는 나도 설렌다.

집에서 챙겨 온 작은 봉투를 하나 마련했다.

병실로 인사를 오게 한 것도 미안하고, 근사한 밥 한 끼 못 사주는 것도 미안해서 생각 끝에 용돈을 담아 봉투에 내 마음을 적었다.

그 발걸음이야 오죽할까? 가만히 생각을 해본다.


사진으로만 봤던 그 청년에게 내 마음도 활짝 열리길 바란다.

그냥 아들 같은 마음으로 이쁘게 봐 지기를.

첫 사위를 맞는 날도 나는 같은 기도를 했다.

이쁘게만 보게 해달라고.

사랑으로만 보게 해달라고.


참 맑은 날이다.

맑은 사람이 왔으면 좋겠다. 밝은 사람이면 좋겠다.

둘째를 웃길 수 있는 사람, 우리 가족을 화합하게 하는 사람,

장차 주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병실에서도 꽃은 피는구나.

엄동설한에도 우리는 꽃을 피워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