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입 없는 보좌관

암 환자 그를 사랑하는 아내

by 본비 은혜

우연이라고 하자.

전통이라고 하면, 또 대를 이어갈 테니.

어제, 낮 두시가 조금 넘어 둘째의 남자친구가 병실로 왔다.

나는 딸의 전화를 받은 아침부터 그 시간까지 커튼으로 구분한 병실의 우리 자리에서 분주했다.

한평이 조금 넘을까 말까한 그 공간의 너저분한 짐들을 어찌어찌 치우고 감추며 정리를 했다.


그의 발! 그의 발이 문제였다.

퉁퉁 부은 발은 양말목을 잘라도 신을 수가 없는데, 한 달 동안 한번 대충 씻어 엉망인 발 상태를 보면서 이 와중에도 그걸 가리고 싶어 어떻게 할까를 고민했다.

맞춤 맞게 병원에서는 2026년도 자원봉사 서비스를 오늘부터 시작한다니 고맙다.

좋은 기회에 발마사지를 받아, 맨발임에도 덜 민망한 상태를 만들었다. 예의는 아니지만, 어쩌나?

하여간 환자로 만나는 것은 참 곤란한 상황이다.

답 없는 머리는 모자를 쓰니 괜찮다.

그도 긴장이 되었는지, 한잠 자고 일어나 내내 컨디션을 관리했다. 귀찮다 귀찮다고 해도 내심 기다리는 눈치다. 시계를 보면서 자고, 깨고.


드디어, 둘째가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왔다.

사진을 봐서 그런가 아주 친숙하고 반갑다. 익히 아는 사람처럼.

보호자 베드에 둘이 앉고, 침대에 우리 둘이 앉았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직장인 3년 차답게 의젓하고 밝았다.

생글생글 잘도 웃는다.


내게 시집을 담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 병실에 계신다고 하셔서, 긴 글보다는 한 편씩 읽으시면 좋을 것 같아서 시집을 준비했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를 준비해 온 센스가 놀라웠다.

딸내미는 놀랍다며 추임새를 넣는다.

오늘 갑작스럽게 오게 된 것이고, 그 친구는 오전 내내 개인적인 용무로 이리저리 바빴다고 했었는데,

어느 틈에 준비를 했는지 자신도 몰랐다며 그의 마음씀에 몹시도 기뻐한다.


나의 취향을 저격당했다. 내가 좋아하는 나태주 님의 시집에, 내게 없는 시집으로.

시집 첫 장에 "작은 마음을 전합니다. 000" 글씨도 동글동글.

글씨에도 성격이 묻어 나는 듯했다.

우리는 참 많이 미안했고, 고마웠다.

사귐이 오래되지 않았는데, 아빠에게 소개를 시키는 것에 대해 그 친구가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했던 딸과 달리, "아버지가 나 인사와도 된대?" 그게 기뻤던 청년이다.

결혼을 전제로 하든지 안 하든지. 부모는 궁금하니까.


우린 그 좁은 병실에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얘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난, "무구지보(無口之輔)"에 대해 얘기를 해줬다. 사귀는 동안 서로에 대한 자세로 한 얘기였다.

조선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거울을 가지고 '무구지보, 입이 없는 보좌관'이란 말을 남겼다. 요즘 내가 계속 떠올리는 단어였다.

'얼굴에 때 묻어도 사람은 혹 말을 안 하지, 그래서 거울은 말없이 모습을 비춰 허물을 보여주니, 입이 없는 보좌관 같다고, 입 있는 사람보다 한결 낫다'는 말이다.

가까운 사람은 가까워서 말 못 하고, 어려우면 어려워서 말 못 하니 거울을 보면서 나를 다듬으라는, 말없이 나를 비추어 내 보좌관은 거울이라는 말을 했다.

"서로 가깝다고 해도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다 하는 말들이 있을 거야. 그게 어떤 행동이든, 말이든지 말이야. 그럴 때 왜 그래? 하고 삐치지 말고 새겨들으면 좋겠어. 서로서로가 말이야.

듣기 싫다고 피하면 절대 못 고치니까. 그렇다고 망설임 없이 말하면 안 되고,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면 좋겠어."

오지랖이라고 무시하지 말고, 서로서로 존중하고 살피길 바란다는 마음을 덧 붙였다.

왜 그 얘기가 떠올랐을까?


전에 없이 내 입냄새를 가지고 아침마다 잔소리를 하는 그는, 입 냄새가 아니라 속이 안 좋은 듯하니 꼭 병원을 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요즘 내가 내 속이냐고. 나중에 병원에 가볼게.

양치질을 하면서 누가 이런 얘기를 해줄까 종종 생각한다.

가까우면 가까워서 말 못 하고, 멀어서 말하기 어려운 그런 얘기를 누가 해줄까?


두고두고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다.

십여 년 전에 대학 모임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작고 귀여운 후배를 반갑게 만났는데, 글쎄 눈썹 화장이 빠진 게 아닌가?

다른 곳은 다 화장을 했는데, 눈썹을 그리는 것을 깜박한 것 같다.

일부러 그렇게 화장을 했는지 알 수도 없기에 몇 번을 망설이다가 말을 못 해 줬었다.

요즘 이런 화장법이 트렌드인가? 예쁜지 모르겠다 생각하면서 최신 트렌드에 대해 민감하지 않으니 더욱더 함부로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촌스럽다 할까 봐.

여럿이 만나서 환하게 많은 얘기를 했는데, 난 그 화장 안 한 눈썹이 계속 신경 쓰였고.

심지어 요즘 화장법에 대해 검색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날을 보내고, 두어 달 후에 다시 만날 일이 있어서 보니 그날 눈썹 화장을 안 한 게 확실했다.

또렷하게 눈썹이 예쁘게 그려져 있었다.


그 후배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화장실 거울을 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숨겼다.

그날의 그 일이 내게 두고두고 마음의 짐으로 남는 것은,

그녀가 집에 돌아가 거울을 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오늘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것에 혹, 배신감은 들지 않았을까?

서운하지 않았을까?


그날의 내 모습을 보면서, 꽤 친하다고 생각한 나도 말 건네기에 주저하는데,

남들은 내게 어떨까?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십 년을 보내고 난 후, 지금은 아주 조심스럽게 알려주고자 한다.

그것이 이빨에 낀 고춧가루라도 말이다. 다시 어떤 불편한 마음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요즘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서 엉망인 내 얼굴을 마주하지만, 누구도 눈화장이 번졌다고 잘 알려주지 않는다.

결국 말 없는 보좌관은 거울인가?

사방에 거울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둘째 딸과 잘생긴 청년은 눈을 반짝이며 내 얘기를 귀 담아 들어주었는데, 그 둘의 관계에 유익이 되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병원으로 첫인사를 왔는데, 밥을 사 줄 수 있는 형편도 안되어 미리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나중에 딸과 좋은 시간 보내라고 하고, 좋을 때에 다시 만나자고 했다.

밝은 청년은 그와 나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고는 기분 좋게 병실을 나갔다.


오늘 그는 피곤해 보이기도 했지만, 오후 내내 꽤 괜찮았다.

둘째 딸은 남자 친구 이름을 대면서 "00테라피 효과"라면서 좋아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중에도 우리는 그에게 끝까지 숙제를 내고 있다.

그는 끝까지 아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자 애를 쓴다.

어느새, 그와 나는 막내딸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나에게서 딸들만 짝을 맞춰서 보내길 바란다.

딸들만 나가길 바란다.


둘째 딸 효과인지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고 한다.

내가 봐도 힘이 들어가 보인다.

" 여보 키트루다가 일을 하나 봐!"

" 하나님이 일 하시나 봐! 할렐루야다!!"


※키트루다 : 주사제 항암제


2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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