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환자 그를 사랑하는 아내
지금 나는 지구가 아닌 다른 별에 와 있는 듯하다.
도저히 우리가 알던 일상의 사회라고는 믿기지 않는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살을 에듯 추운 한겨울임에도 바닥이 절절 끓는 방의 온기를 경험하는 일이 그렇고, 마주치는 이들의 형언할 수 없는 친절이 그러하다. 그들의 표정은 그 자체로 천사의 얼굴을 닮아 있다.
언젠가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신 분이 "천국을 미리 경험하고 간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이제야 그 말의 참뜻을 알 것 같다.
영락홀에서는 이곳에서 부모님을 떠나보낸 자녀들이 커피 봉사를 나왔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카페가 아님에도, 그들이 정성껏 준비한 커피와 간식은 여느 전문점 그 이상이다. 병원에 머무는 모든 이가 넉넉히 나눌 수 있도록 아낌없이 내어놓는 그 마음이 향기롭다. 그 커피 향이 병실 밖 복도까지 가득 찼다.
오늘은 멀리 통영에서 오신 목사님의 설교가 울려 퍼지고, 부산에서 온 초등학생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고사리손으로 청소 봉사를 한다. 지역 곳곳에서 찾아온 음악 치료사들은 병실마다 바이올린과 기타를 들고 찾아가 평온한 선율을 선물한다.
지난주에는 기타 연주 소리에 마음을 기대어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오늘은 그저 고요 속에 머물고 싶은지 연주를 정중히 사양했다. 이토록 극진한 사랑과 평화가 흐르는 이곳, 나는 지금 지상 위의 천국에 있다.
어젯밤,
그는 비워내지 못한 몸의 무게와 한바탕 고단한 씨름을 했다. 아침에는 요구르트, 매 끼니때마다 변비약을 챙겨 먹어도 기별 없는 소식 대신, 아랫배를 짓누르는 묵직한 불편함만이 그를 괴롭혔다. 시중의 관장약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차마 어쩌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힘들어했다.
간호사가 직접 손으로 도와주는 '수지관장'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그는 부끄러움이 앞서 망설였다. 그 민망함을 이겨내고자 그를 설득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여보, 우린 모든 게 다 처음이잖아. 샴푸도 발 마사지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결국 다 좋았지? 수지관장도 한 번도 안 해봤지만 분명 하고 나면 편해질 거야. 우리 한 번만 믿고 해 보자."
결국 깊은 밤 SOS를 쳤다. 달려온 간호사는 정성 어린 손길로 수지관장을 마친 뒤 좌약을 넣어주고 갔다.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화장실로 향했고, 그 막막한 순간에도 간호사의 도움을 빌려야만 했다.
밤새 침대에 누워서도 복통은 가시지 않았고, 지친 기력과 수면제 기운, 그리고 온갖 불편함이 뒤섞인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얕은 잠과 깨어남을 반복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지쳐 잠든 그의 입에서 "이제 배는 편해졌다"는 말이 나왔다. 다만, 여전히 끈질긴 암 통증은 가시지 않아 다시 진통제를 찾는다.
"이제 밥 안 먹을 거야. 살기 싫어. 먹으라고 하지 마."
물 한 모금, 두유 한 팩을 권하는 나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마저 듣기 싫다며 그는 서글픈 눈으로 말한다. 아내로서 건넬 수 있는 유일한 말이 그것뿐인데, 이제는 그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어젯밤의 고된 사투가 그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것일까. 미안함과 수치심이 뒤섞인 그에게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봐도, 그는 완강하게 곡기를 끊겠다 선언한다. 너무도 또렷한 정신이 오히려 그를 더 고통스럽게 몰아세우고 있다.
며칠 전 샘물호스피스 안내 책자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면서 임종 전 증상과 자신의 병세를 분석하며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 듯하다. 화장실 거울 속에 비친 낯선 초상을, 뼈만 남은 야윈 육신을 마주하며 그는 붙잡고 있던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지나치게 섬세하고 꼼꼼했던 성격답게,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포기하고 있었다.
온기가 식어버린 식판이 나가고 다시 새 식판이 들어오지만, 그는 힐끗 곁눈질할 뿐이다. 시원하다며 보리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물조차 거부한다.
20년 전, 그의 아버지가 죽음 앞에서 그러하셨듯 그 역시 결연한 의지로 자신을 제어하고 있다. 우리는 그때 아버님의 그 단호한 뒷모습을 함께 보았었다.
식사 때가 되면 요양보호사들이 나를 챙긴다.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고 혼란스럽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스러져 가는데, 그를 간병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밥을 먹으러 가는 나의 모습이 못내 서글프다.
식당의 풍경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일상의 활기로 식사하는 직원들과,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삼키며 수저를 드는 보호자들.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을 것이다. 이 밥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식판 앞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눈물부터 차오른다. 하지만 이 밥이라도 먹어야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그의 마른 등을 닦아주며, 그의 손과 발이 되어줄 수 있기에 나는 오늘도 꾸역꾸역 눈물 섞인 밥을 삼킨다.
화창한 햇살 아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속절없이 따뜻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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