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당신도 은혜바라기?

말기암환자 그를 사랑하는 아내

by 본비 은혜

새벽녘,

수면유도제를 맞고 잠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 같다.

간이침대에 멀찍이 있지 말고 굳이 침대 곁으로 의자를 당겨 앉으란다. 자기만 보고 있으란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마 했다.

잠든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평생 어리광 한번 못 부려봤을 그의 삶이 못내 짠해졌다. 뒤늦게 시작된 그 귀한 투정을 내가 아니면 누가 받아줄까. '아들 하나 키운다 셈 치지 뭐' 마음먹고 나니 모든 게 괜찮아졌다. 얼마든지 해요, 다 받아줄 테니.

하지만 평온도 잠시, 잠에서 깨어난 그는 다시 통증과 마주하며 진통제를 찾는다.


아침,

돌봄 휴직을 위한 인수인계차 학교에 가야 한다니, 그는 벌써 불안해하며 "엄마 없으면 큰일 난다"라고 아이처럼 시위를 한다. 아침도 거부하는 그를 품에 안고 몇 번을 달랬다.

"오늘만 다녀오면 다시는 안 가. 금방 올게." 그제야 마지못해 등 떠미는 그가 애처로워 진통제를 챙겨주고서야 병실을 나섰다.

간호사들마저 언제 오느냐 묻는 걸 보니 다들 '은혜 바라기'가 되었나 보다.


업무 대체자를 만났다. 차분한 그녀의 눈빛을 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론 미안함에 마음이 아릿했다.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일들이 몰린 2월인데, 이 무거운 짐을 오롯이 그녀의 어깨에 지우고 떠나는 것 같아 차마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3월에는 오시길 바라요." 낮은 목소리로 건네온 그녀의 말은 '어서 돌아오라'는 위로였을까, 아니면 '혼자서는 감당하기 벅차다'는 부탁이었을까. 나는 차마 확답을 주지 못한 채, 미안함을 가득 담아 입술 끝만 살짝 올려 보였다.


늦은 오후,

한참 만에 들른 집, 고양이 호떡이가 웬일로 눈을 오래 맞춘다. 소파에 앉기가 무섭게 쏟아지는 애교를 보니 녀석도 내 손길이 몹시 그리웠던 모양이다. 그러다 창가로 달려가 밖을 향해 우는 뒷모습을 보며, 텅 빈 집을 둘러보다 그만 쓸데없는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좁은 방에 갇혀 지내는 게 못내 불쌍해, 이번 주말 녀석을 알바트로스로 보내기로 했다.


사랑하는 둘을 동시에 떠나보내야 하는 길목에서 자문해 본다.

나, 정말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할 일이 태산인걸. 보고 싶을 때 찾아가면 되지. 갇혀 있는 것보다 자유로운 게 나으니까.' 억지로 나를 다독이며 다짐한다.

그래, 이제는 그에게도, 녀석에게도 기꺼이 자유를 주어야 할 시간이다.


잠시 소파에 기대려는데 딸아이의 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엄마를 엄청 찾아요!" 나의 '큰 아기'가 기다린다니 지체할 수 없었다. 다시 병원으로 향하는 길,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어찌나 이쁘던지 따스한 빛이 꼭 힘들어도 잘하고 있다는 격려처럼 느껴진다.

병실에 도착해 비몽사몽인 그에게 다가가 보고 싶었느냐 물으니, 그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출근 안 하고 여보 옆에만 있을 거야. 좋지?" 내 약속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잠결에도 "너 돈 없어서 어떡하냐"며 내 걱정부터 한다. 평생을 내 걱정이더니, 아픈 와중에도 오롯이 나를 염려하는 그 마음에, 짠함과 고마움이 밀려왔다.

은혜의 영향력은 어디까지 인지,

혹시 당신도 은혜바라기인가요?


26.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