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생애 마지막 만찬을 선물해 준 사람

인연 이야기

by 본비 은혜

사놓고 모셔두기만 했던 스테인리스 도마가 주방 한구석에서 2주째 빛을 내고 있다. 요리를 하겠다는 야심 찬 다짐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도마는 그저 세련된 디스플레이 소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던 오늘, 그 차가운 금속판 위에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낮 시간, '왕터 덕분언니'로부터 반가운 연락이 왔다. 참기름을 짜러 학교 앞 방앗간에 나왔다는 전화다.

신호등 저편에 서 있는 언니를 본 순간, 반가움이 앞섰다. 언니는 나를 만나길 작정이라도 한 듯, 구운 청계란과 직접 쑨 도토리묵을 안고 왔다. 언니의 손은 언제나 이토록 풍성한데, 내 손은 늘 받기만 하는 미안한 손이 된다.


학교 문 앞 카페에 마주 앉아 쓴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풀었다. 갓 짜낸 참기름의 고소한 향처럼 고소하고 두서없는 대화들. 왕터의 새 주인 이야기, 정겨운 동네 소식, 그리고 그리운 고양이 호떡이 이야기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수다에 시간은 야속하리만큼 짧게만 흘러갔다.

카페에서의 재회는 잊고 지낸 지나온 시간의 냄새를 불러왔다. 자동차 한대 지나갈 만한 길 하나 사이에 두고 2층집에 사는 언니는 내려다보고, 나는 주차장이나 화단에서 올려다보면서 마주치는 일이 많았고, 몇 걸음만 떼면 서로의 집 문턱을 넘나들던 시절이었다. 잠깐 뭔가를 주고만 간다고 하다가도 주차장에서 한 시간을 넘기면서 이야기 꽃을 피우던 날들이 참 많았다. 언니는 우리 가족의 외출과 귀가를 살피는 다정한 감시자이자, 가족보다 더 가까운 이웃이었다.


자격증만 있을 뿐 정작 맛을 내지 못해 쩔쩔매는 나에게, 언니의 예사롭지 않은 손맛은 축복이었다. 한 번은 몸보신하라며 토종닭 한 마리 잡아 덥석 안겨주셨다. 압력솥도 없어 큰 냄비에 하염없이 끓여내던 주부의 무모함이라니. 고무줄처럼 질긴 닭고기를 보며 난감해했지만, 남편은 그 마음이 귀하다며 살을 발라 죽을 쑤어 먹자고 했다. 살 바르는 것도 꽤 힘들었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꺼내니 언니는 "압력솥 아니면 못 먹는 걸 그냥 끓였냐"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압력솥까지 빌려서 제대로 된 백숙 맛을 보았던 토종닭 소동과 파김치를 좋아하는 내 막내딸을 위해 늘 넉넉히 김치를 담가주시던 그 큰 손 덕분에 나의 왕터 살이는 늘 풍성했다.


"오래 살지도 못할 것을 왜 와서 마음만 아프게 하고 갔냐"는 언니의 장난 섞인 핀잔 속에, 짧지 않았던 그 시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왕터를 떠나기 직전, 언니네 내외와 함께 먹었던 삼겹살은 잊을 수가 없다. 함께 차를 타고 나가 웃으며 나누었던 그날의 식사는 항암으로 맛을 잘 모르고 입이 짧았던 그가 모처럼 맛있게 먹고는 "정말 맛있게 많이 먹었다"며 두고두고 이야기할 만큼, 그것은 단순한 한 끼가 아닌 진심이 담긴 환대였다.

그날 이후 그의 식사량은 눈에 띄게 줄었고, "맛있다"는 말도 좀처럼 듣기 어려워졌다. 우리가 꼭 대접하겠노라 약속했지만, 넷이 함께하는 식사는 다시 만들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내게 그날의 삼겹살은 언니네가 그이에게 선물해 준 '생애 마지막 만찬'처럼 가슴 깊이 박혀 있다. 그가 배불리 먹는 뒷모습을 보게 해 준 언니네에게 갚지 못할 빚을 진 기분으로 고맙기가 한 없다.

집으로 돌아와 언니가 건네준 꾸러미들을 식탁에 펼쳤다. 도저히 그냥 냉장고에 넣을 수 없어 2주간 비어있던 주방 앞에 섰다. 잘 먹어주는 것만이 언니의 마음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기에.

나를 다시 먹게 하려는 언니의 마음이 느껴져 스테인리스 도마 위에 탱글한 도토리묵을 썰고, 파를 다지고 김을 부수는 내 손길에도 힘이 들어간다. 언니가 농사지어 직접 짠 고소한 참기름을 듬뿍 넣어 양념장을 올렸다. 곁들인 구운 청계란 두 알. 가지런히 차려진 식탁 앞에서 언니와 언니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함께했던 그 시절에 대한 감사 기도를 올렸다.


꼭 안아준 언니의 격려와 그 큰 사랑에, 나는 오늘 다시 살아갈 기운을 얻는다.

문득 생각해 본다.

부족함 없는 언니에게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러다 오늘 못다 한 약속 하나를 마음속에 품어본다.


"언니, 우리 조만간 저녁 먹고 영화 보러 가요. 요즘 유행하는 <왕과 사는 남자> 같이 봐요."


물질이 아닌 마음을, 고마움이 아닌 시간을 나누고 싶다는 고백. 덕분 언니의 풍성한 손길 덕분에, 나의 왕터 살이는 오늘도 '새록새록' 기억나는 찬란한 봄날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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