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비 은혜
살아오며 참 많은 선물을 주고받지만, 유독 마음 한구석에 등불처럼 켜져 있는 기억이 있다.
오래전, 6개월간 모셨던 직장 상사분의 승진 발령을 앞두고 마지막 근무 날, 나는 예상치 못한 귀한 선물을 받았다.
아침의 소란스러움이 잦아든 오전, 상사님은 불쑥 내게 지갑을 가져오라 하셨다. 당시 나는 현금을 쓰던 터라, 손때 묻은 황금빛 장지갑을 들고 그분 앞에 섰다. 노란 지갑을 보시더니 "돈을 부르는 지갑이네"라며 허허 웃으시던 그분은, 품 안에서 빳빳한 신권들을 꺼내 놓으셨다.
그해 막 발행된 5만 원권. "신사임당 얼굴을 자세히 본 적 있나?" 물으시며, 신권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소중히 간직해 온 것이라 하시며, 10만 원권 수표 한 장, 5만 원권 한 장, 그리고 1만 원과 10달러까지. 한 장 한 장 의미를 담아 내 지갑에 넣어주셨다.
"이건 그냥 쓰는 돈이 아니라, 이 지갑을 지켜줄 돈이네. 가볍게 쓰지 말고 정말 꼭 필요할 때 꺼내 쓰시게."
돌아가신 친정아버지 연배라 그저 살갑게 대했을 뿐인데, 상사님은 그 마음이 고마웠다며 깊은 축복을 건네주신 것이다. 물건을 선물 받은 적은 많아도, 누군가의 세월과 행운이 담긴 '돈'을 선물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앞날을 응원하는 어른의 진심 어린 '마음'이었다.
그날 오후,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소란스러운 인사가 싫다시며 퇴근 시간보다 조금 일찍 조용히 나가시는 그분의 뒷모습을 혼자 배웅해 드렸다. 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한참 동안 서서 그 자리를 지켰다. 존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내드린 그 배웅은,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중한 마지막 인사였다.
시간이 흘러도 내 지갑 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빳빳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누군가에게 지갑을 지키는 돈을 선물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 사람의 삶이 늘 풍요롭길 바라는 가장 간절한 기도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돈보다 귀한 것이 넘쳐난다고들 하지만, 때로는 그 흔한 돈 한 장에 무엇보다 귀한 '진정성'이 실리기도 한다. 액수의 많고 적음은 이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곰곰이 되새겨볼수록 그분이 내게 건네고 싶었던 것은 물질 그 이상의 '마음'이었음을 깨닫는다.
무엇으로 당신의 고마움을 전할까 얼마나 고민하셨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당신이 지녀온 그 복된 기운을 오롯이 내어주고 싶으셨던 걸까.
오랜 전통의 족발집에서는 대를 이어 내려온 씨물을 가장 각별한 이에게만 한 바가지 나누어준다고 한다. 내게 주신 이 돈 역시 내 인생의 '씨물'과 같다. 단순히 소비되는 화폐가 아니라, 복되고 잘 되는 기운을 전해주신 것이며, 지갑이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어른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씨앗이다.
그 돈은 노란 지갑 속에서 꽤 오랫동안 자기자리를 지켰다. 그 지폐가 내 인생에서 종잣돈의 역할을 하였는지, 그분의 축복이 깃든 덕분일까. 내 지갑은 넘치지도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내 지갑을 풍성하게 채우는 것은 지폐의 숫자가 아니라, 그날 내게 건네주신 복된 말씀과 "반드시 잘 될 것"이라던 격려, 그리고 인생의 거름이 되는 귀한 조언들이다.
살아가며 문득문득 받게 되는 선물들. 그 속에는 저마다의 마음이 담겨 있고, 나는 그 마음을 읽어내는 법을 배운다.
지갑을 지키는 돈, 그리고 그보다 더 단단하게 내 삶을 지탱해 줄 그분의 진심.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 법을, 그리고 그 귀한 선물을 가슴에 새기는 법을 또 하나 배워간다.
다만, 두고두고 가슴 한편에 아쉬움으로 남은 건, 그분께 마땅한 답례를 해드리지 못한 일이다. 무엇으로 그 큰 마음을 갚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서성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가 버렸다. 이 생각이 떠오를 때면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싶은 자책이 마음을 건드린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분께서 진정 바라셨던 답례는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 당신이 건네준 그 기운으로 내가 오늘을 꿋꿋하게, 그리고 풍성하게 살아내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비록 손에 잡히는 선물은 드리지 못했으나, 삶의 순간순간 그분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2025년 9월,
내 이름이 정갈하게 새겨진 도장 하나를 선물 받았다.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뿔이 아닌, 희귀해서 구하기조차 어렵다는 흰 물소 뿔, '백수우'로 만든 도장이었다.
나의 우여곡절과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께서 건네신 이 귀한 물건에는 깊은 염원이 담겨 있었다. 정들었던 왕터 집을 떠나 낯선 아파트로 보금자리를 옮겨야 하는 나를 위해, 그분은 직접 도장을 새기며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을 축복해 주셨다.
"백수우는 맑고 깨끗한 기운을 불러들인다고 합니다. 앞으로 이 도장으로 기쁜 일에 사용할 일이 아주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도장을 건네며 덧붙이신 그 한마디는 단순한 덕담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불안한 출발선에 선 내게 건네는 가장 단단한 응원이자, 앞날에 펼쳐질 행운에 대한 확신이었다.
작년 가을, 아파트를 계약하던 날.
나는 소중한 백수우 도장을 꺼냈다. 서류 위에 도장을 올리는 순간, 그분이 담아주신 맑은 기운이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종이 위에 붉은 인경을 묻혀 '꾹' 하고 눌러 찍은 그 자국은, 단순히 계약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나온 시간을 갈무리하고, 새로운 삶의 문을 여는 당당한 첫걸음이었다.
여전히 나는 그 갑작스럽고도 귀한 도장 선물에 문득문득 놀라곤 한다. 누군가의 이름을 정성껏 새긴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이 좋은 곳에서 빛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귀한 재료를 찾아 헤맸을 그 시간들.
지갑 속에 '지키는 돈'이 있어 든든했다면, 이제 내 손 안에는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대신해 증명해 줄 '맑은 빛의 약속'이 있다. 백수우 도장이 새겨준 붉은 자국처럼, 나의 새로운 시작도 그분의 축복을 닮아 선명하고 복되게 피어나길 소망해 본다.
내 삶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궤적을 그려왔다. 하지만 그 길목마다 나를 귀하게 여겨주는 인연들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나는 오늘을 살고, 그들이 건넨 생각지 못한 귀한 선물들 덕분에 나의 일상은 때때로 기적 같았다.
누군가는 '지갑을 지키는 돈'이라며 당신의 행운을 떼어주었고, 또 누군가는 '맑은 기운'을 불러들일 백수우 도장에 내 이름을 정성껏 새겨주었다. 그 과분한 마음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대체 무엇으로 이 큰 사랑을 갚으며 살아야 할까?"
늘 서성이다가 돈을 선물해 주신 분께 끝내 답례를 드리지 못한 기억은, 지금도 문득문득 내 한숨의 끝에 걸려 있다. 그때의 미안함이 너무 커서, 이제는 새로운 호의를 받을 때마다 덜컥 겁이 나기도 한다. 또다시 '너무 늦어버린 마음'이 될까 봐 스스로를 경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고민의 방향을 조금 바꿔보려 한다.
받은 것들을 똑같은 물질로 되돌려주는 것만이 보답은 아닐 것이다. 지갑 속의 돈이 내 삶을 지켜주었듯, 나 또한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든든한 존재가 되는 것. 백수우 도장으로 찍은 그 선명한 이름처럼, 내게 허락된 새로운 터전에서 부끄럽지 않게 성실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이자(利子)가 아닐까.
서성이다 놓쳐버린 시간들에 대한 자책보다는, 내게 닿은 그 귀한 기운들을 세상에 다시 흘려보내는 따듯한 어른이 되고 싶다. 나를 귀하게 대접해 준 그분들의 마음이 헛되지 않도록, 나 또한 누군가에게 '지갑을 지켜주는 온기'가 되고 '앞날을 축복하는 맑은 인경'이 되어주리라 다짐해 본다.
귀한 선물로 인생을 배웠으니, 이제는 그 가르침대로 나의 삶을 향기롭게 채워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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