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비 은혜
그동안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내 필명 '본비 은혜'를 두고 다양한 추측을 내놓곤 했다.
누군가는 ‘봄비’의 오타가 아니냐고 물었고, 사촌 오빠는 ‘Born to be’의 약자가 아니냐며 나름의 해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 이름에는 오래전 인연으로부터 2년이라는 긴 기다림과 한 사람의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시작은 해설사 활동을 하던 시절이다. 지인의 SNS를 통해서 그분은 친구들의 성격과 특성을 해학적이면서도 정감 있게 풀어 별호를 지어주시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글들에 매료된 나는 나를 보는 타인의 시선이 궁금해졌고, 나만의 ‘호’ 하나를 갖고 싶다는 순수한 부러움에 별호를 지어달라 부탁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연수를 가는 버스 안에서 그분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왜 호가 갖고 싶으냐"는 물음에 나는 단원 김홍도나 율곡 이이처럼 자신만의 이름을 남기는 이들의 멋스러움을 이야기했다. 비록 그림을 그리지는 않지만, 내 이름 앞에 매력적인 ‘별호’을 갖고 싶노라고 말했다.
그 후 일 년, 이 년... 그분이 다른 부서로 자리를 옮기며 소식은 뜸해졌고, 내 호를 지어주시기로 한 것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그러다 마침내 나의 직장 근처 행정복지센터로 승진 발령받아 오셨다는 소식에 축하 전화를 드렸더니, 호 부탁했던 것을 기억하고 계신다며,
"아직 호를 결정짓지 못했는데, 곧 마무리해서 연락을 하겠다."라며 기다린 것에 미안함을 담아 말씀해주셨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를 나타낼 단 한 마디를 찾기 위해 고민하셨음을 알게 되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 분께서 호를 가볍게 짓는 게 아니었음을 알았다. 내가 쉽게 생각했던 것이지, 그게 쉬울 일인가.
퇴임을 얼마 앞둔 어느 날, 퇴근 전 잠시 사무실로 들러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간 그곳에서 그분은 붓펜이 없어 사인펜으로 썼음을 아쉬워하시며, 내 호에 대한 글을 쓴 것을 정성스레 액자에 담아 전해주셨다. 사인펜의 소박한 획 속에 담긴 그분의 깊은 고뇌와 애정 어린 시선의 결정체가 있었다.
그렇게 내게 온 이름이 바로 ‘본비(本翡)’이다.
본비 김은혜
본비, 풀잎향 은은한 분!
가만히 핀 모습 흔들리지 않네
웃어도 살짝 꽃 핀 듯
좋은 모습만 씻어낸 풀잎 얼굴
향기 날리지 않아도 머무는 곳에 향을 두고 오시는 분
이 마을 골골 본비꽃 피어 우리 중생덜은 영광 영광!
본비님 앞길에 항상 향기 흘러라!
그분이 말한 ‘본비(本翡)’는 일본계 고급 원예식물인 풍란의 중에서도 상당히 가치가 높은 품종의 하나로, 잎 무늬, 뿌리 색깔이 루비색 또는 적색으로 손꼽히는 귀한 부귀란의 이름이다.
찾아보니 일본에서도 그 수가 적어 희소성이 높고,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울 만큼 단아하고 고고한 자태를 지닌 품종이란다. 풍란에 문외한인 내 눈에는 그저 작고 단정한 난으로 보였지만, 그분이 나를 지켜보며 내린 정의는 이랬다.
“무리에 있되 없는 듯하고, 없는 듯하다가도 분명 자기만의 색이 있는 모습이 꼭 본비를 닮았다.”라고
향기를 억지로 흩뿌리지 않아도, 머물다 간 자리에 절로 향이 남는 사람.
튀려 하지 않아도 본래의 비취색(翡) 근본(本)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사람.
그분이 2년 동안 나를 관찰하며 찾아낸 나의 진면목이었다.
생각해 보니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내가 머문 자리가 조금 더 향기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본비'는 단순히 불리는 호칭이 아니라, 내가 지향해야 할 삶의 매무새이자 가장 따뜻한 격려다.
문득 예전 직장 상사분이 해주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아는 듯한데 말이 없고, 모르는 듯하면서도 알고 있네."
그것이 나의 처세이자 색깔이었나 보다.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삼키고, 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안전지대'를 만드는 것. 그것은 나를 보호하는 방식인 동시에 타인을 품어내는 나만의 방식이기도 하다. 화려한 원색으로 시선을 끌기보다, 연녹색 비췻빛으로 풍경 속에 스며드는 본비꽃처럼 말이다.
붓펜이 없어 사인펜으로 꾹꾹 눌러써주신 그 글자들을 다시금 들여본다.
향기를 억지로 날리지 않아도, 내가 머물다 간 자리에 은은한 풀잎 향이 남기를. '본비'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오늘도 나는 나만의 안전지대 안에서 고요히 나만의 빛을 지켜내려 한다.
애써서 지어주신 호, 필명으로 가치있게 사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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