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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성순 Nov 01. 2023

길고 하얀 구름의 섬, 뉴질랜드(1)

크라이스트처치

 언젠가는 한 번쯤은 가게 되리라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선뜻 떠나지 못한 곳, 뉴질랜드로 향한다. 남반구의 외진 곳에 자리 잡은 섬나라, 그곳의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마음 한 귀퉁이에 치워져 있던 곳이라 갑작스런 제안을 받았을 때 이렇게 쉽게 떠나도 되나 하는 염려가 있었다. 그러나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말을 떠올리며 여행을 결심했다.

 따스한 5월의 주말이었지만 밤 비행기는 추웠다. 긴 비행 끝에 북섬 오클랜드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여름의 끝자락이 남아있는 듯 예상보다는 따듯한 공기가 감도는 가을 날씨다. 남섬으로 가기 위해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한 후 크라이스트처치행 비행기에 탔다.  


   크라이스트처치 - 행복은 꿈꾸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것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내린 후, 시내를 가로질러 점심식사를 하러 갔다. 수제 햄버거 식당인데 서부영화의 배경으로 나와도 손색이 없을 만큼 고풍스러운 분위기다. 빵과 패티와 야채가 한 더미 쌓여 나온다. 식사를 끝내고 시원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식당 옆에는 가을이 물들어가는 작은 공원이 있다. 드문드문 서 있는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야생잔디가 무성하다. 잔디 위에서는 한 가족으로 보이는 팀이 경기를 하고 있다. 노란 삼각 깃발이 여기저기 꽂혀있고 작은 골프채를 들고 경기에 열중하고 있는 가족들이 보인다. 5~6세 정도의 어린애들과 중년의 부부, 허리 구부정한 할아버지까지 다들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골프공을 몰아가서 깃발 아래 홀에 넣는 식인데 홀 주변에만 잔디가 깎여있을 뿐 무성한 잔디와 낙엽 때문에 일반적인 골프장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홀 사이 간격도 3~5m 정도로 골프라고 하기엔 소박한 규모다. 이곳 사람들이 가족 스포츠로 즐기는 미니 골프라고 한다.


 문득 어렸을 적 오빠들과 하던 구슬 놀이가 떠오른다. 마당 곳곳에 홈을 파고 정해진 경로를 따라 구슬을 던져넣으며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면 이기는 경기였다. 구슬이 미끄러져 들어갈 때의 짜릿함. 홈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을 때의 아쉬움. 엉뚱한 곳으로 던져버린 후의 허탈감. 그 순간순간 내지른 외침과 웃음과 탄식. 그렇게 놀이에 몰두하며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우면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온갖 감정들이 가라앉으며 정서적 포만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잠시 자그마한 골프채를 들고 공에 집중하고 있는 6살 꼬마가 되어본다. 그 아이는 온 가족의 넉넉한 품 안에서 당당한 경기 구성원이 되어 규칙을 배우고 자존감을 만들어 간다. 함께 하는 할아버지 또한 얼마나 큰 기쁨일까? 함께 살면서도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 여지가 별로 없는 현대사회의 가족들을 돌아보면 이들의 오늘은 빛나는 행복이다. 부러움과 함께 가슴 한구석에 숨어있던 내 어린 시절의 오래된 행복감에 젖는다.     


 점심식사 후 간 곳은 남반구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헤글리 공원이다. 아름드리나무가 즐비하고 사이사이 넓은 잔디밭과 산책로가 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에이번강은 강폭이 넓은 곳도 10여m 정도다. 물이 맑아 물고기도 많고 포식자인 오리도 많다. 붉게 물들어가는 우람한 나무들은 오래된 사연 하나씩 품고 있을 듯 하다. 공원 내에는 로즈가든과  보타닉가든이 있어서 아기자기하게 구경하는 맛도 있지만, 지금은 가을이라 꽃들은 거의 지고 있다.



 이곳을 아름답게 하는 건 사람들이다. 넓은 공간에 비해 사람들은 많지 않아 한가롭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연인들과 활기찬 발걸음으로 운동하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가족 단위의 소풍객들도 있다. 5~10여 명이 모여 앉아 휴일을 즐기는 모습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가족들은 햇살 아래에서 음식을 먹고 수다를 떨고, 가져온 접의자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들은 오래된 나무 아래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나무는 울창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그들을 가만히 품어준다. 그들의 가벼운 웃음과 이야기들은 목가적 분위기의 가을 풍경화를 완성시킨다.

 저 밝은 웃음의 이면에도 일상의 걱정들이 숨어있으리라. 대출금이나 미결인 채 남아있는 직업상의 업무들, 그런 일상 속에서도 잠시 따듯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반짝이는 행복 한 조각을 만들어 삶의 갈피에 넣어둔다. 그들의 행복은 일상의 삶 속에 배어있다. 대부분의 인간 감정이 그러하듯 행복도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차근차근 쌓여서 그 깊이만큼의 행복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므로, 이들은 꿈꾸기보다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늘이 푸르고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서늘한 가을날의 주말을 즐기며 행복을 만들어 가고 있다.  

   

 공원 가운데를 굽이돌며 가로지르는 에이번강에서 배를 탔다. 멋지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선미에서 장대로 배를 밀어간다. 강의 양편으로 늘어선 나무들은 가을로 가는 자락에서 단풍으로 물들어 아름답고, 느리게 흐르는 강물은 잔잔하며, 먹이를 찾아 분주한 오리 가족은 생동감을 더해준다.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배에 앉아 나도 이 자연을 눈으로, 몸으로 느껴본다. 반짝 빛나는 행복의 순간을 포착해 보려 한다. 맑은 강물 속에는 높은 하늘의 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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