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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프레스 에스프레소

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by 규린종희

사거리 골목 낀 집이라 오가는 사람들의 언어를 국수가락처럼 들으며 산다. 무엇을 먹고 지난밤을 건너왔는지 흘리는 말속에 짐작해 본다. 먹어야 이루는 생이니 나는 아침마다 사람의 말을 먹는다.

감꼬투리 살찌는 시간이다. 머지않아 둥근 이마 감꽃 열릴 날 오겠지. 이상하지... 감꽃은 열리고 장미는 핀다. 감꽃은 달려있고 찔레꽃은 맺혀있다. 감꽃은 주렁주렁하고 찔레꽃은 그렁그렁한다. 아버지는 찔레꽃을 따서 말렸지. 어디 찔레꽃만 그랬겠나.

장작이 타들어가는 아궁이 앞 고무통... 언니들은 뜨거운 물에 퉁퉁 불린 막내의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돼지털 뽑듯 때를 밀었다. 그런 날엔 연탄불 돼지껍질처럼 내 껍데기들이 물 위에 둥둥 떴다. 누룽지처럼 말라붙은 것들이 불리면 얼마나 불려지겠나. 뿌리는 살 속에 박힌 채 대가리만 수건에 걸려 뜯기는 형국... 터실터실 보푸라기 핀 몸이라도 벗기고 나면 말갛게 속을 보였으니... 그 재미로 어린 살갗이 벌겋게 피도록 언니들은 비벼댔는지도 모르지...

헹굴 때가 되면 언니하나가 아버지 방으로 쪼르르 갔다. 아버지는 기다렸다가 꽃주머니를 내주었는데 그 속에 말린 이들 저들 저산 이산이 가득 들었다. 꽃목욕... 그 시절 그 척박함 속에서도 나는 찬란하게 꽃목욕을 했다. 뜨거운 물이 담긴 고무통에 꽃주머니를 푹 찔러놓으면 ᆢ마른 꽃이 저마다 향을 게워냈다. 꽃이 풀어내는 물색에 언니들은 첨벙첨벙 장난을 치고... 하나는 물을 피해도망가고 하나는 물을 뿌리고... 또 하나는 나를 씻기며 그렇게도 웃어댔다.

고무통에 물을 담아 집에서 목욕하는 막내만의 특혜... 꽃물에 손을 담가 한 통속이 되던 그때는 아버지도 엄마도 할아버지도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간지럼을 태우던 언니들의 손끝을 피하려고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던 나를 그토록 사랑해 주던 사람들... 일부는 죽고 일부는 살아, 이젠 산자의 기억 속에서나 폴폴 풀려나온다.

언젠가는 나도 죽은 사람이 되겠지. 그러니 순간순간 나를 사랑할 수밖에... 살아있는 감나무아래 날마다 뺄셈으로 걸을 수밖에... 익스프레스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느리게 마시는 아침이 고마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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