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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프게

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by 규린종희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나. 저마다 가슴 저민 이야기 하나쯤은 있어야 아찔한 기억도 있지. 사연 없는 인생 없듯이 노래에 사연을 얹으면 인생 애창곡이 된다.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같이 목메어 운다... 남진이 불렀던 <가슴 아프게>는 노랫말만 보고 있어도 아프다.

아카시아 향기 너울너울 번지고... 못자리 어린 모 비로드처럼 자라고... 헛간옆 살구나무에 살구 조랑조랑하고 초록이 더욱 깊어지는 48년 전 그때... 산천은 한 마디로 생동 그 자체였다.

봄이 다 가는 날에 그는 두 번째 맞선을 봤다. 동생을 여섯이나 둔 장남... 위로 조상을 섬겨야 하는 장손의 결혼 문제는 대소 간의 최대 관심사였다. 서울에서 하던 일을 모두 접고 돌아온 그는 말 없는 여자면 좋다고 했다. 그냥 묵묵히 따라주고 어른들 잠 섬기는 여자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맞선 보고 돌아올 그를 기다리며 종조모와 종숙모들이 안방에 모였다. 엄마는 말이 없었지만 그녀들의 수다는 콩타작하듯이 탁탁 튀어 올랐다. 자신의 이질녀를 중매한 먼 친척은 그녀들의 수다에 어깨를 들썩들썩했고 정작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혼사 이야기로 만화방창했다.

늦은 밤. 그가 돌아왔다. 우아기를 벗어 어깨에 걸치고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은 그가 안채로 들어섰다. 방안의 그녀들이 방문을 열어 마당을 밝혔다. 대청으로 올라 안방에 들어온 얼굴빛이 붉으스레 했다. 적당히 취기가 오른 그의 복잡한 마음이 얼굴에 일렁일렁했다...

아하! 하루 종일 기다리던 그녀들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 튄다.... 선 본 처자가 어땠는지 종조모의 말에 그녀들이 와글와글 한 마디씩 보탠다. 그러더니 엄마를 돌아봤다. 정작 엄마만 말없이 아들을 살폈다

-그냥 할 랍 니 다...

장손의 말에 종조모들 화기가 돈다. 누구 하나는 사랑채 할아버지방으로 소식을 전하려 갔다. -우리 장손 노래한 번 들어보자...
누가 그랬는지 노래를 들어보자며 박수로 장단을 맞춘다. 어라!! 이미 잔치집이다.

아...
술이 취한 장손이... 맞선을 보고 온 장남이 눈을 감고 노래를 하는데...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를 불렀다. 조도 낮은 백열등아래 벽에 기댄 그의 그림자가 들썩인다. 봤다 그날 그의 눈이 젖은걸... 내 나이 아홉 살 밤에 본 K장남의 무게...

이제야 그날 가슴 아프게 불렀던 까닭을 묻고 싶으나 정작 그가 처지를 달리해버렸다. 가슴 아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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