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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들의 전쟁

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by 규린종희

할배하고 엄마는 교육문제로 묘하게 신경전을 펼쳤다. 할배는 장손만 공부시키면 되는 전형적인 남성장자제일주의자였고 엄마는 교육만이 살길이란 신여성이었다. 그러니 요 셋 말로 입시철만 되면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엄마의 부화는 그 끝이 아버지를 향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木鷄라 번번이 엄마만 스스로 참패를 인정해야 했다.

일찍 상처한 할배는 사랑채로 다섯 동생을 불러 병풍처럼 치고 엄마를 압박했다. 집성촌 맏종부로 대소가의 일들을 진두진휘하던 엄마의 기를 이기려면 동생들의 힘이 필요했을 테니까. 할배의 다섯 동생 들은 거의 날마다 사랑채로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하는 건 돌아가며 소리 내어 책을 읽는 일이다. 삼국지 열국지 초한지 여인열전 왕비열전... 주로 정사보다는 야사 비사에 방점을 두고 날마다 윤독했다. 그러니 엄마는 할배와 다섯 동생들의 술상 밥상을 챙겨야 했고 ᆢ마당을 가로질러 상을 들고 가는 건 의례 내 몫이었다. 할 일 많은 엄마를 정지에 묶어둠으로써 일차적인 방어선을 만든 셈이다

할배의 다섯 동생들이 소리 내어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음색에 담긴 그들의 지난밤을 읽을 수 있었다. 소리란 것이 탁하고 말라 자주 문장이 끊어지면 유쾌한 밤을 보내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날엔 꼭 술주전자를 두 번이나. 더 가져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입엔 종일 사탕이 녹고 있었으니 할배의 다섯 동생 들은 내 치통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 싶다. 아무튼 그때 윤독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글자를 익혔고 문장의 리듬을 보았고 덕분에 어마어마한 상상력이 생겼던가 보다.


머리 풀고 이산 저산 떠도는 문장도 들었고. 논두렁 아래 샘물 같은 맑은 문장도 보았다. 널뛰듯 광폭으로 내달리는 것도, 갈퀴를 날리며 광야를 달려가는 근육질의 궁둥이도 그런 날 알았다. 그러다 마침내 진짜 글을 익히던 날 귀로 듣던 문장들이 넌출거리는 통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할배의 다섯 동생 들은 엄마에게는 부화의 불쏘시개 나한테는 상상의 플랫폼이었다.

참. 희한하지. 그 와중에도 엄마는 할배 옷만큼은 정성을 다했으니... 겨울엔 햇솜으로 속을 채운 솜바지에 누비덫저고리를 입혔고... 여름엔 삼베를 풀하여 서걱서걱 찬바람도는 바지 적삼을 입혔다. 댓돌에 고무신은 새신같이 하얳으며ᆢ두루마기는 언제나 반듯하게 동정을 달았다. 부부회로 하는 다섯 동생들에게 형님의 권위를 세워준 건 엄마였지 싶다. -아내 없다고 내가 후줄근한 줄 알았냐 동생들아 형님 살아있다- 뭐 이런 뉘앙스를 풍겨준 건 엄마였으니...

그 옷들이 구부갈등의 정점이 되고 방점이 되었다. 서로의 고집이 팽팽하게 마당을 가로지를 때... 빨랫줄 터지듯 기가 부딪치는 날이 있다. 풀 먹인 새 옷을 사랑방으로 배달힉ㆍ고 아침상을 물리고... 언니들이 학교 가고... 아버지도 출타하고... 그 너른 집에 할배 엄마 나만 있을 때다. 먼지 나지 말라고 마당에 뿌린 물이 마르기 전이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할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젖은 마당을 데굴데굴 굴렀다. 뭐라고 말은 했지만 지금 기억 속엔 없다. 그날은 큰언니 고등학교 진학문제로 며칠째 신경전이 이어졌던 것 같다. 안채에서 부리나케 뛰어나온 엄마가 할배를 일으켜 세웠다. 할배는 말없이 사랑채로 갔다. 나는 엄마가 내준 할배의 새 옷을 들고 사랑방으로 갔다. 엄마는 흙 묻은 할아버지옷을 세탁했다. 꾸덕꾸덕 마를 때쯤 풀 먹여 널었다.

다음날도 할배는 마당을 데굴데굴 굴렀다. 엄마는 그제처럼 할배를 일으켜 세웠고 나는 엄마가 내준 새 옷을 들고 사랑방으로 갔다. 그제 풀 먹인 옷은 다듬이질을 끝내고 동정 다는 일만 남았다. 엄마는 또 흙 묻은 할배옷을 그제처럼 했다. 두 사람 사이엔 여타부타 말이 없었다. 일상은 늘 그랬듯이 흘렀으나 신경전은 서서히 정점에 닿고 있었다. 한 삼일이 지나고 아침상을 내오는 데 할배가 한 말씀하신다

- 안에 가서 엄마 오라고 해라

엄마가 사랑채에 다녀왔다. 툭탁툭탁 소리를 내가며 가재도구를 정비하는데 그날따라 다듬이방망이는 대들보가 들썩이도록 요란했다. 왠걸 ...할배가 마당을 또 데굴데굴 구른다. 이번엔 엄마도 달려가지 않았다. 다듬이소리에 갇혀 할배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풀에 꺾인 할배가 혼자서 일어났다. 나는 엄마옆에 앉아서 그냥 보기만 했다. 할배가 엄마에게로 걸어왔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한 말씀하고는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엄마가 내준 새 옷을 들고 사랑방으로 갔다. 엄마는 상대방 힘 빼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제풀에 꺾여야 싸움이 끝난다는 것을 나는 그때 보았다.

할배의 다섯 동생들이 오랜만에 왔다. 기가 막히게 구부간의 갈등이 있다는 걸 알아 피했고 ᆢ끝나기를 기다려 스며들었다. 때를 알아 긴 것인지... 때를 주지 시켜 협조를 구한 것인지는 지금도 모른다. 그들이 모두 죽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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