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천지에 금계국이 넌출거려. 이상하지... 금계국 필 때면 폴릭세네가 생각날까.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아버지를 따라나선 그 밤 아킬레우스를 사로잡은 여자... 전쟁과 죽음, 사랑과 전쟁,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준 여자... 또한 인간은 사랑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함을...
사랑은 첫눈처럼 온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지. 배터리를 고무줄로 칭칭 감은 낡은 라디오 듣던 날이었어. 낮부터 내린 눈이 해거름이 되자 쌓이기 시작하더라. 눈이 쌓인다는 건 땅의 온도와 눈의 온도가 같아지는 지점... 그때... 사랑도 그렇다고 생각했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두 사람의 온도가 같아지는 지점... 그렇게 시작된 간절함이 사랑이라 생각했어.
그날. 눈발에 뒤섞인 주파수를 잡으려 안테나를 이리저리 세우며 라디오를 들었어. 아버지는 이른 저녁 군불을 넣고 캐시미어 담요를 깔아주네. 나는 아랫목에 발을 묻고 찹찹한 흙벽에 기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었어. 그리고 편지를 썼어. 미지의 나에게... 미지의 그에게... 보내지 않을 편지... 하얀 세상은 황홀 그 자체였지 비록 밤이었지만...
조도 낮은 가로등 아래 나를 기다리는 소년을 상상하며 눈 쌓이는 마당을 밤 깊도록 봤어. 헛간 옆 닭들도 잠들고... 마루밑 메리도 잠들고... 해지면 울어대던 부엉이도 잠잠한 그 밤... 함박눈은 물반한 쌀가루처럼 내려앉더라고... 눈빛에 눈을 열어 눈을 보고 있으면 어느 것은 작약 꽃잎처럼 나풀거리고 어느 것은 오동꽃처럼 다소곳하고 또 어느 것은 수국처럼 붕실붕실 하더라. 하~~ 바람 없는 밤... 함박눈은 정말이지 정말이지 소복소복 내리더라.
눈과, 사랑과 설렘과 그리움이라는 말을 상상하면서 점찍듯 공책을 채웠어. 종이를 걸어 나가는 흑심이 그런 날엔 꽃봉오리 벙글듯 했으니...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해 툭 부러지는 감나무가지만 아니라면 난 그대로 굳어버렸을지도 몰라. 그 밤 나뭇가지에 쌓이는 눈을 보면서 그리움도 그렇게 쌓인다고 생각했어. 감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그리움의 무게였을 거야.
하필 그때 라디오에서 <우먼 인 러브>가 나와. 사랑에 빠진 여인... 중학교 1학년, 처음으로 딴 나라말 영어를 배우면서 우리말로 적어 외운 노래야. 어쩜 그 노래를 외우면서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졌는지도 몰라. 인생에 사랑이 빠지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마도 그 노래가 사춘기 감성을 첨벙거린 두레박일줄이야. 노랫말에 취하여 노래를 좋아하던 때라 금계국처럼 온통 흔들리던 마음을 붙들어주었는지도...
날이 좋아. 어제 없던 꽃이 오늘 있어. 나는 새벽 어스름을 깨고 나온 푸른 예감... 노랑언덕을 산보하는 지금의 언어... 촉촉한 언어를 이정표 삼아 비틀거리는 그림자로 걸어도 좋을 날이야. 사랑에 빠진다면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