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어떤 기억은 끌어오고 또 어떤 기억은 끌려나간다. 가파른 길은 가보지 않아도 숨이 차고 까마득한 시간은 빛이 보이지 않는다. 멀어진 것은 저물녘에 머물고 흔들리는 것은 늘 지금 여기다.
그땐 그랬다. 외삼촌은 월북하고 고모부는 납북됐다. 전쟁이... 이데올로기가 가져온 기막힌 상처를 모두 보았다. 외삼촌은 전향을 거부하며 북을 선택했고 고모부는 교사라는 이유로 납북됐다. 두 사람의 행적은 그때 이후로 아무도 모른다. 물리적으로는 죽었겠지만 그들의 주검을 봤다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하마 죽었을 두 남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
외삼촌의 아내는 아들 하나와 유복자 딸을 품고 살아내고 마침내 한 생을 끝냈다. 누대높은 기와집을 송두리째 뺏기고 겨우 세 칸 땅집에 숨죽여 살아냈던 그 집으로 가는 그집으로 가는 골목길엔 철마다 꽃이 피더라는... 능소화가 굼실굼실 타고 오르는 여름 외가엔 옥수수 냄새가 났고...감자꽃 피는 날엔 밀볶는 냄새가 났지
왜관을 종점으로 하는 완행버스를 타고 비포장 신작로를 한 시간쯤 가면 약목면 사무소가 나온다. 버스에서 내려 외가로 가려면 면사무소를 끼고 첫 번째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낮은 담을 끼고 10분 걸으면 외가 지붕이 보인다. 외가로 심부름 보낼 때 엄마는 꼭 사이다 한 병 사서 가라고 당부했다.
그놈의 사상에 아들을 뺏긴 외할매 답답증이 있었다. 며느리 보기에도 미안코 손자 생각하면 앵통 하고 아들 생각하면 원통하니... 죽을 때까지 사이다에 밥 말아먹었다. 기름 바른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훑어모아 쪽진 꼬부랑할매는 녹두알보다 작았다. 지붕 낮은 집 두 여자는 그나마 남겨진 두 아이가 있어 의지해 살다가 죽었다.
또 한 여자... 고모의 남편은 국민학교 선생이었다. 할아버지의 먼 곳 지인 외동아들이 고모 남편이 되었다. 아직 처녀티를 벗어내지도 못했고 태기도 없는데 그만 전쟁이 터졌다. 결혼 다섯 달 만의 일이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경찰. 군인. 선생 가족은 무차별 총살하거나 잡아갔다. 그 속에 고모의 남편도 있었다. 남편이 끌려간 후 그만 생과부가 되었다.
남편을 빼앗긴 것도 무섭고 서러운 일인데 시부모의 학대는 상상이상의 것이었다. 아들 잡아먹었다고 그들이 죽기 전까지 냉대를 했다. 사립문 출입을 금했으며 그 누구와도 말 섞지 못하도록 처절하게 감시했다. 할아버지 생신 때 어쩌다 친정으로 원행 했으니 그런 딸을 그냥 볼 수밖에 없었던 울할배 속은 또 오죽했겠나.
외가에 심부름 가듯 엄마는 고모에게도 심부름을 가끔 보냈다. 고모한테 가는 길은 완행버스를 타고 왜관버스정류소에 내려 석적행 완행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버스정류소에는 사과 밀감을 다섯 개씩 담아 파는 행상이 있었다. 엄마는 그곳에서 꼭 밀감이나 사과를 사라고 당부했다. 나는 엄마의 당부를 꼬박꼬박 지켰다.
왜관철교를 왼쪽으로 끼고 고모집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 신작로를 비틀비틀 30분쯤 가야 한다. 석적 국민학교 정류장에 내려 고모가 사는 포남리에 가려면 어린 내걸음으로 30분은 족히 걸었다. 코흘리개 열 살짜리를 혼자 보낼 때는 고모의 숨통이나 틔어주라는 것이겠지. 모진 시어른들 아래서 그래도 친정이 있음을 보여주는... 어린 게 무슨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고모 품에 한 사흘 보내다 오면... 엄마보다 할아버지가 더 좋아했다.
고모방은 창이 없었다. 햇빛 한 자락 들지 않는 뒷방에 유폐되어 북쪽으로 난 낮은 문으로 허리 숙여 드나들었다. 그래도 생질녀가 왔다고 밤이면 품으로 끌어안아 재웠고 낮이면 몰래 사탕을 입에 넣어주었지. 사탕 굴리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내 입술을 이래저래 다독이던 손가락 온기... 찔레꽃처럼 보드라웠다.
그방 오래된 횟보 아래는 고모의 남편 옷이 두벌 걸려있었다. 두루마기 한 벌과 양복 한 벌... 빛이 들지 않아 곰팡내가 흙냄새처럼 밴 그 방에서 고모는 오직 다섯 달 살아 본 남편이란 남자의 죽은 옷을 의지하며 평생을 살아냈다. 나 죽으면 관 속에 저 옷 같이 넣어 태워다오... 유언을 입버릇처럼 했고 우리는 지켰다.
이지러짐과 이루어짐이 거듭하여 일어나는 생의 한가운데... 오래 묵어 익숙했던 것. 편안했던 것을 정리하는 일은 아득히 먼 길처럼 자꾸만 들여다보게 한다. 묵은 옷들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걷는 아침이 새삼 좋다. 깊은 초록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예전엔 몰랐다. 유월이 오고 있다
누구를 원망하랴 그때가 그런 시절이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