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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차남

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by 규린종희

오래된 시집을 꺼냈다. 안표지에 찍힌 시인의 사진은 박제되어 살아있다. 한 사람이 와서 남긴 흔적은 시작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암각화가 되었다.


그때는 그때의 바람이 불었겠지. 그때의 바람은 지금의 바람으로 왔고 오래된 언어가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오래된 언어는 독특한 어조를 가진다.


집안을 일으키는 형님을 대신하여 기꺼이 형님 이름으로 군대를 간 동생이 있었다. 3년 6개월 군복무 제대하고선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입대한 사람... 직업군인도 아닌 그가 이십 대 청춘을 군에 바친 위대한 K차남이다.


차남은 우리 집 유일한 중졸이다. 세 살 터울 형의 학비를 대기 위해 정작 자신의 진학은 포기했다. 형의 공부가 끝나는가 싶으면 동생들 학비를 벌어야 했으니 이래저래 코가 땅에 닿도록 지게를 졌다.


정선의 그림 <빙천부신>은 k차남을 떠올리게 한다. 얼어붙은 한강변 나뭇짐 지고 절벽길을 오르는 두 사람. 나뭇단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반으로 꺾인 허리로 가늠해 보는 기막힌 장면이다. 가장의 무게로 산다는 건 허리가 굽도록 짐을 지고 걷는 길이다. 그 속에 정작 자신은 없다... 6.70년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돈벌이 가야 했던 이 땅, 가난한 언니오빠들의 숙명 같은 삶이 그랬다... 장녀들은 입주가정부로... 차남들은 공장으로...


나는 그랬던 k차남의 청춘을 날름날름 받아먹고 자란 k막내... 어느 해인가. 그가 처음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했다. 합천 해인사인가 어딘가를... 겨울이 끝나는 때인지 시작하는 때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아침... 내 눈을 피해 몰래 가려다 딱 걸렸다. 따라간다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나를 달래며 사과 한 알 쥐어주었다.


-우리 막내... 이거 먹고 있으면 오빠 두 밤 자고 올게


그래도 나를 두고 그럴 순 없지... 눈물 콧물 범벅으로 데굴데굴 구르고 바지를 잡고 매달렸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친구 하나가 사진기를 꺼낸다.... 오빠하고 사진 찍자... 오빠가 두 밤 자고 올 때 사진도 갖고 올게... 찰칵 소리에 그만 오빠를 내줬다.


그렇게 견디며 살아낸 K 차남의 세계는 오래된 언어, 처음의 언어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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