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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남 루트

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by 규린종희

사람의 감정이 순백으로 드러날 때가 사랑할 때다. 모든 것이 그대로 보일 때... 금방 돌아서 왔어도 다시 달려가고픈 마음... 통속이 주는 애절함. 아니 애틋함... 사랑할 때만큼은 누구나 위대한 시인이 된다.

세상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다가오고, 모든 것이 신비로우며... 온다는 기별이 있으면 모든 촉각이 길섶으로 마중가는... 멀리서 몇 가닥 머리카락만 보여도 지축이 흔들리는... 마침내 눈 속에 들어오면 말보다 먼저 귓볼이 붉어지는... 사랑은 그렇게 우리를 희열에 들게 한다

열여덟 무렵 아모레 쾌남 루트도 그랬다. 까만 뚜껑 초록 병에 담긴 남성화장품... 수십 년이 지났어도 그날의 향기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다른 감각에 비해 후각이 매우 섬세한 편이라 나는 향기로 사람을 기억한다. 그러다 보니 향기에 대한 편집이 있어 특별한 향에 고집이 있다. 가령 조말론 블랙베리에 대한 애착 같은...

사춘기를 어찌 보냈는지... 내게 청소년기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를 하나로 기억케 하는 향기는 있다. 유월이 막 시작될 때지 싶다. 할배와 아버지 방으로 저녁상이 들여가고, 안방과 대청에 식구들이 둘러앉았다. 4대가 한집에 살 던 때라 식구가 열다섯인가 그랬다.

전화기가 울렸다. 어린 조카가 건네주는 수화기를 들었다. -마을 앞에서 기다린다... 는 말만 남기고 뚝 끊어진다. 대구에서 주말마다 집으로 내려오는 B였다. 두 살 위. 1년 선배... 대학생이 된 소년은 무기력한 내게 도시 생활과 캠퍼스의 향연을 먹이 주듯 실어 날랐다. 딱히 내가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싫지도 않은 그냥저냥 한 이웃 동네 오빠...

식구들의 눈치를 봐가며 저녁을 먹는데... 기다린다는 그에게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어정쩡한 상황... 시간은 흐르고 어둠은 더욱 다가오고... 어린 조카들은 놀아달라 알랑거리고... 사랑방 할배는 그날따라 자꾸 부르고... 에라... 가족들에게 포위당하기 싫어 탈출했다. 집에서 동네 어귀까지는 걸어서 15분... 그런데 이전과 다른 감정이 몽글거린다.

전봇대에 기댄 그의 실루엣이 조도 낮은 가로등 아래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저녁하늘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멀리서도 시선을 확... 끌어당겼다. 멋진 모습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쿵쾅쿵광... 가슴이 기차 화통 같이 뛰기도 한다는 걸 나도 처음 알았다.

낙동강 둔치까지 두 시간 족히 걸었지 싶다. 그 밤의 정경이란... 모내기를 끝낸 논에 개구리가 야단이고... 여울 건너 검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엔 온갖 향기 섞여 흐르고... 밤뻐꾸기는 또 왜 그리 울어대는지... 종아리에 감겨드는 여름풀이 따갑기도 부드럽기도 한 그 밤... 별은 얼마나 많은지... 심장 소리는 또 얼마나 큰지... 그 소리 감추느라 헛기침을 해대는 데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더 크더라...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지금도 기억에 없다. 옥수수 이파리처럼 서걱서걱 스치는 옷깃이... 담배 연기를 길게 뽑아내는 소년의 입술소리가... 괜스레 울려 퍼지는 마른기침 소리가... 끝을 알 수 없는 너른 들판에 너울을 일으켰지. 그때... 울퉁불퉁 들길을 걷는 내 몸이 그만 그에게로 기울어졌다. 순간 나를 일으키는 그의 입김이 내 귀를 스쳐갔는데... 그의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빠져나온 화장품 냄새... 그 냄새... 잊을 수 없는 그 향이 아모레 쾌남 루트였다. 깊은 초록의 신성 같은 향기... 쾌남 루트...

감나무에 감이 별처럼 맺혔다. 어린것들이 톡 떨어질 때마다 기억도 톡톡 터진다. 마침내 사라질 시간들이 두리번거린다. 깊어질수록 선명해지는... 어두울수록 반짝이는 순간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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