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뮤지션 시리즈 커피를 만났다. 오직 코스타리카에만 그렇게 이름을 붙인다고 했다.
코스타리카는 특유의 섬세한 산미가 있어 좋다. 종아리를 훑고 가는 초가을 바람 같은 첫맛에 감각이 집중된다. 모차르트라 명한 코스타리카 첫맛은 베토벤의 월광 1악장처럼 잔잔했다. 그러나 두어 번 마실수록 치근 사이로 올라오는 산미가 말러의 음악처럼 격정으로 흩어진다.
맛이란 취향의 문제라 타인에게 권유하는 건 어쩌면 정서적 강요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연하게 내 취향에 대한 것만큼은 확정 편향을 가진다. 어릴 때 밥상에서부터 길들여진 취향은 어른이 된 뒤에도 쉬이 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길들여진 취향은 나도 모르게 소울푸드가 되지는 않았는지 되짚어보는 한낮을 걷는다.
32도...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익어가던 노란 참외는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단맛이다. 여름 태양에 다글다글 익은 참외 한알... 얄삭한 껍질에 지렛대처럼 대문니를 박아 깨무는 첫맛... 입속으로 들어오는 참외 뽀얀 속살과 혀 밑에 고인 단물이 주는 희열은 나이가 더해갈수록 영혼을 채워주는 기억이 되었다.
이제는 아는 사람조차도 희박한 식재료가 하나 있다. 양대이파리다. 양대는 긴 꼬투리에 일곱여덟의 알갱이가 들어있다. 녹두나 팥보다는 한참 크고 유월콩보다는 한참 작다. 하얀 빛깔의 토실한 몸통에 까만 눈을 가진 콩이다.
양대이파리는 늦여름 지나 가을초입 제대로 맛이 든다. 양대이파리는 아궁이 솔갈비 불로 지은 밥에 쪄서 먹는다. 무쇠솥에 밥이 뜸 들 때... 밥물이 끓어 솥뚜껑을 밀어 올릴 때 밥 위에 쪄야 맛이 난다. 밥물이 이파리에 같이 들어 풋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맛이란 먹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타인의 도시에서 한낮을 딩굴거린다. 먼바다를 가까이 보며 옛일과 쉬고 있다. 한낮은 깊고, 돌아갈 시간은 가깝다 오십 년 전 기억은 눈앞에 섰는 듯 선하고, 눈앞의 커피는 아득하다. 소울푸드까지 불러낸 커피 한 잔의 시간이 유한 속의 무한이다.
희한하다. 커피를 구입하여 다른 곳에 가면 그 맛은 재현되지 않는다. 딱 그때 그 장소 그 사람이 아니고선 그 맛을 찾을 수 없다. 지나간 맛은 돌이킬 수 없다. 달아난 잠처럼, 돌아선 사람처럼... 영혼을 채우는 맛은 그래서 영혼을 일으킨다.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온 맛이기에 그 기억이 오래오래 내 맛의 감각에 각인된다. 산자의 영혼이 둘이 될 수 없듯이 순간 또한 한 번이다.
커피집을 나왔다. 왜 모차르트인지 궁금했지만 이유는 묻지 않았다. 베토벤 음악을 들을 때 바리스타의 긴 손가락을 기억하고... 말러를 들을 때 커피를 내어 온 그의 느린 걸음을 생각해야지. 짙은 눈썹에 적당히 높은 코 유럽피언을 연상시키는 바리스타의 선한 눈을 생각하며 음악을 들어야지...
정오의 코스타리카, 여행지에서 보내는 엽서처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