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렌시아

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by 규린종희


잔치는 보름동안이나 열렸다. 집안의 첫 경사니 그럴 법도 하다. 보름동안 술단지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고 과방의 음식은 풍족했다.

장남의 결혼식 3일 전부터 먼 곳의 친척들이 도착했다. 경향 각처에 있던 종고모부들을 시작으로 아버지 사촌, 육촌들이... 그들의 집으로 가지 않고 우리 집으로 몰려왔다. 할배 사촌들은 사랑채로 들어 자리를 잡았으니 마당을 사이에 두고 어른들이 득시글득시글했다.

그들이 착착 오는 대로 상을 차려낸 울 엄마 얼마나 힘들었겠노. 그런데 엄마가 더 좋아하더라... 손 빠르기는 엄마를 따를 자 없고 인정이 손맛이었던 시절이니... 감주를 만들고, 술을 담느라 우리 집 과방엔 질검과 누룩이 떨어질 때가 없었다. 술단지가 보글거리는 소리만으로도 술이 익는 정도를 그때 보았다. 종숙모들은 전을 부치고, 고기를 썰고, 마당 한쪽엔 육개장이 펄펄 끓고...

종고모부들은 처가를 두고도 우리 집에 몇 날을 묵었다. 그러니 이부자리며 소소하게 챙겨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노...그래도 도시 아재들의 하얀 목덜미가 그땐 참 눈부시더라. 아재들이 풀어내는 도시이야기가 참 좋더라. 구슬 구르듯 매끌매끌 말씨의 서울 아재는 재담꾼이라 처남댁들을 한 마디로 웃겨주었다. 요샛말로 음담패설이었겠지... 서울 아재가 자리 잡은 그 방엔 밤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랫사람 자리에 들지 못한 종조모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해거름이면 질펀한 노래판이 깔렸다. 종고모부들, 종숙모들이 부르는 노래란 노래는 그때 거의 다 외웠지 싶다. 울고 넘는 박달재, 개나리처녀, 애수의 소야곡, 잘 있거라 부산항. 이별의 부산정거장. 번지 없는 주막. 추풍령고개, 목포의 눈물, 유정천리... 아 , 불효자는 웁니다도 있지. 찔레꽃.... 지금 내가 기억하는 노래는 거기서 나왔으니...

예식이 끝나고 새댁이 신행올 때까지 그들은 또 3일을 머물렀다. 새댁이 싣고 오는 새살림 구경을 하고... 새댁이 시집의 부엌에서 처음으로 차려내는 첫 밥을 받고서야 잔치는 끝났다.

신행 오는 날. 분홍치마저고리를 입고 대문으로 첫발을 들이는 새언니... 치맛단아래 살짝 내민 하얀 고무신... 족두리를 쓰고 눈을 살짝 감아 턱을 당겨 반쯤 가린 얼굴... 정말 예뻤다. 진짜 고왔다. 그냥 좋았다. 울 엄마 마흔셋에 날 낳아 할매처럼 보였는데... 새언니가 젊은 엄마 같았으니... 나는 껌딱지가 되었다.

종조모들이 빽빽 둘러앉은 안방 아랫목에 방석을 깔고 새언니가 자리하자 그때부터 삼동 사람들이 새댁구경을 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새사람 심정은 아랑곳없이 구경을 해댔으니...
낯선 집 낯선 풍경에 새처럼 앉아있는 새댁 곁에서 아홉 살 나는 호위무사가 될 수밖에...

사돈어른 형제분과 울아버지가 따로 상을 받아 방에 들었다. 이어 새언니와 오빠가 그 방으로 건너가고... 한참 지나 방문이 열리는데 새댁의 눈이 연지보다 붉다. 딸을 시집보내는 사돈어른... 입은 웃는데 눈은 운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부녀의 이별... 딸은 시집가면 영영 남이 된다는 걸 그때 보았다.

그러고도 또 3일간의 잔치가 이어졌다. 이 집안으로 시집온 딸들과, 저 집안으로 시집간 딸들의 노래는 퍼도 퍼도 마르지 않더라. 대구로 시집간 종고모 노래는 구미로 시집간 울고모를 따라오지 못했다. 이야 , 울 고모는 천상 가인이라. 물 오른 수양가지처럼 낭창하게 착착 감아 든다. 개나아아리~우우무우울가아에 ~~ <개나리 처녀>를 부르는 데 반쯤 열린 입술로 빠져나오는 소리가 천상 개나리더라...

재종고모 <동숙의 노래>는 연구개를 눌러 나온 공기를 입천정에 모아 첫 소절 뱉는데 그것이 문풍지 떨리듯 하더라. 시집온 지 오래되어도 늘 새댁 같던 종숙모 <앵두나무 처녀>를 부르는데 살짝살짝 어깨춤 모양이 잠자리 꼬리 같더라. 그 잔치판 노래판에서 본 딸들의 노래는 그야말로 별세계였다...

생각해 보면 노래란 게 흩어져 살아가던 혈족들을 끈끈하게 뭉쳐주는 힘이더라. 잊혀 모르는 것들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더라. 아니지,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게 하는 벗이더라... 내가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노래가 주는 울림 떨림이 마침내 나를 끌어 세워주니... 어쩌면 나의 카렌시아가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의 사람들은 죽었어도, 그때 부르던 노래는 살았으니... 훗날, 누가 내 노래를 기억해 주기도 하려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