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있다
어떤 언어는 푸른 강물로 흐르더라. 초록이 동색으로 깊어지는 시간이야.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바야흐로 亨의 계절이야. 기계를 통해 내린 커피향기가 달아. 푸른 눈 사람이 내어 온 올리브 같은걸. 어젯밤 쓰던 글은 서랍 깊은 곳에 봉인하고... 붉은 그림으로 가는 문지방을 건널 거야.
아카시아 쥬시후레시 후레시민트 스피아민트 이브껌 에뜨랑제 수노아 롯데꽃편지... 이맘때 꽃냄새는 껌냄새를 닮았어. 아니지. 껌냄새에 꽃냄새를 담았다고 해야 하나. 어떤 건 꼭 이브껌처럼 향기가 씹혀. 껌은 씹는 맛으로 씹어. 이가 없던 종조모는 껌도 오물오물 씹던데. 그럴 때마다 인중을 사이에 두고 세로 주름들이 단층처럼 움직이더라고. 아랫집 종숙모는 질겅질겅 씹대. 한 번씩 타닥하고 아랫니 윗니 사이에서 공기방울이 터질 땐 캐스터너츠 소리 같더라니까.
아. 맞다. 다섯 살 많은 셋째 언니는 별나게 껌을 씹더라고.. 한나절 씹어 단물이 빠지면 손으로 조물조물 가지고 놀았어. 단물 빠진 껌은 백화 된 시멘트 같았지. 공기가 더해지면 적당하게 굳은 껌을 손가락으로 주 물어 양쪽으로 주욱 당겨서 접어. 안반 위 손칼국수처럼 접힌 껌을 검지에 도르르 말아 손바닥으로 비비면... 껌 반죽에 생긴 기포들이 동시에 타다닥 터지는데... 그 경쾌함이란... 아는 사람만 알지.
또랑또랑 야무지기로 소문나서 종조부들의 총애를 듬뿍 받았어. 내 눈에도 그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니까. 여섯 살에 천자문을 뗐고 아홉 살엔 동네 동생들에게 한자를 가르쳤다나 어쨌다나. 두 번 말하지 않도록 뭐든 매끈하게 깔끔하게 잘했다고... 엄마는 두고두고 말했지. 키는 작아도 다부져 달리기도 일등이었고 열두 살엔 학교 대표 배구선수도 했으며 운동신경과 학습신경이 딸 넷 중 월등했다고... 그런 까닭으로 할배는 사랑방 한 귀퉁이를 치외법권 구역으로 내주었어.
엄마의 눈을 피해 이성교제의 물꼬를 텄고 일찍이 펜팔로 먼 동네를 이웃동네로 나를 착시시켰어. 각이 반듯하게 잡힌 필체로 고등학교 3년 동안 펜팔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편지를 먼저 받아주면서 씹다만 껌을 받아 씹었지. 아직 단물이 남은 껌을 내 입에 넣어주는 걸 무슨 상장처럼 받았으니...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일이지.
전남 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3구... 하얀 편지 봉투에 또박또박 적힌 주소는 라스코동굴의 벽화처럼 그들의 신화가 되었지. 여름밤의 은하수처럼 접도구역을 넘어 오가는 편지를 몰래 훔쳐보면서 껌 씹듯이 사연을 씹었을 거야. 회정리 3구의 그 남학생도 필체가 뛰어나더라. 언니가 석봉체라면 그는 송설체처럼 간들간들했으니...
그 둘은 껌종이를 이어 붙여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편지봉투를 열면 껌냄새가 우르르 쏟아지더라. 가끔 뚝 떨어져 번진 잉크자욱이 우연인지,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도 이브의 머리카락으로 보이더라. 어느 날은 책을 보내오던데, 붉은 표지 검은 글씨의 <오멘>, 하얀 표지의 <모모>, 연갈색 표지의 <크레이머&크레이머>... 국민학교 4학년인 나는 표지만 읽었고.
전라도와 경상도. 벌교읍 회정리와 고아면 봉한리를 오가는 편지는 삼양라면 두 박스를 채웠지 아마. 사랑방에 숨어들어 이들의 편지를 읽으며 나도 이성교제의 꿈을 상상했는지도 몰라. 아니지. 그때 껌종이에 적힌 시들을 보면서 다른 나라 사람의 이름을 외웠지. 릴케. 하이네. 워즈워드, 예이츠... 그들의 이름은 장미처럼 빛나더라. 영자 명자 기숙 희숙 현숙 점이... 이런 이름들 사이에서 날마다 눈뜨는 내게 외국 이름들은 혁명이었지.
보성군 벌교읍 회정리 3구 ㅇㅇㅇ 남학생은 육십을 넘겼을 테고... 그들의 명문장들은 신화의 세계였어. 봉인된 봉투를 열어보는 두근거림과 설렘이 나를 이끌었는지도 몰라. 무엇이든 써두고 보는 습관이 그때 시작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