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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든 웃는 사람

그리운 건 언제나 멀리 있다

by 규린종희

위대한 역사 앞에 내 빈약한 언어는 언제나 무색하다.


왓 마하타... 가장 커다란 사원을 뜻하는 태국언어다. 수코타이 왕궁내 수많은 사원은 허물어지면 허물어진 대로 기울어지면 기울어진 대로... 칠이 박탈되면 그 채로 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곳 유적은 행정이 보전유지 하는 게 아니라 세계인의 관심과 발걸음... 저마다 얻은 감동이 영감으로 이어진 이야기로 유지되고 보존되는지도 모른다.

일행과 일부러 멀어졌다. 내 심상에 각인될 형상에 어떤 틀도 끼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거대한 석주는 숭숭 구멍이 뚫린 채 풍화되고 있었다. 햇볕아래 드러낸 석주의 행렬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든 불상은 웃고 있다. 아래에서 위로 까마득한 지점으로 눈을 감고 부처의 입술을 보았다. 턱이 받친 아랫입술 위로 반쯤 감은 눈꺼풀이 설핏 이어져 있다. 입꼬리에 올라간 눈꼬리가 인간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렇지. 인간이 궁극으로 가야 하는 세계는 입꼬리에 올라간 눈꼬리의 세계이다. 부드럽게 응시하는 모든 시작은 부드럽다. 딱딱한 틈을 열고 나온 처음을 알아차림은 곧 의식의 응시이다.

내가 수코타이에 온 까닭은 처음에 대한 응시였다. 여러 무리의 여행자들이 일제히 지나간 오전 11시 불단에 올랐다. 여덟 개의 원주가 4열로 줄지어선 가운데 불상이 정좌해 있다. 선정의 수인으로. 그윽한 미소를 보내는 불상이 주는 평온함에 세상사의 무게감이 밀려나가고 있었다. 나는 태국식 참배를 했다. 두 손을 모아 허리를 숙여 첫 예를 하고, 바닥에 꿇어 두 번 예를 올렸다. 어떤 바람도 없이 오직 그 순간에 몰입하는 것, 오직 그 순간으로 있고 싶었다

자오선의 그림자를 따라 머플러를 펼쳤다. 발에 덧씌워진 신발을 벗겨내고 내피 같은 양말도 벗었다. 맨발에 닿은 데워진 바닥은 정수리까지 차고 오른다. 몸을 느끼는 순간에 있다. 부처님 전에 고요히 앉았다. 눈을 감았다. 윗눈꺼풀의 무게를 받아 든 아래눈꺼풀 사이에 속눈썹이 완충작용을 해준다. 완충지대란 비무장지대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충돌을 완화하고, 충돌에 따른 충격의 완충지대... 나와 불상 사이의 완충, 바닥과 나 사이의 완충... 완충이란 온전한 충만을 얻기 위한 중간지대이다. 오직 심상의 존재로 채워지는 공간이야말로 완충이다.

몸을 읽는다. 뜨거운 바닥에 닿은 면적이 넖을수록 땀에 젖었던 몸이 마르기 시작한다. 자전거 페달을 밟아 왓 마하탓으로 오는 동안 몸 안에서 밀려 나온 체액이 몸 밖에서 말라간다. 아마도 이 물기마저 말라 거죽의 바닥이 드러난다면 소금밭에 이는 바람처럼 가스랑 가스랑 푸른빛으로 가벼워질 수도 있겠다.

나는 엉뚱히게 불상에 다글다글 피는 소금꽃을 보고 있었다. 해인... 진리의 말씀을 찾아 바다를 소요하는 중이었다. 소금밭은 말라 푸른 사리로 맺히겠지. 바닷물은 어디에 닿아도 바닷물이듯 진리는 어디에서든. 진리로 존재하니까

젖은 몸에 닿은 셔츠가 몸으로부터 박리되었다. 셔츠와 몸 사이에 바람이 지난다. 그 바람에 셔츠가 펄럭인다. 셔츠의 펄럭임에 몸의 지점을 알아차리고 공기의 마찰을 알아차린다. 나는 더 깊이 침잠했다. 아니 침잠이라는 생각 없이 그냥 가라앉도록 내버려 두었다. 가라앉아 바닥에 닿도록. 심상에 집중했다. 뜨겁던 바닥이 사라졌다. 나를 데웠던 햇볕의 기운이 나를 통해 바닥으로 내려간 때운이다. 그런 이후엔 몸의 존재도 사라지고 오직 바람을 알아차리는 내 의식만 남았다. 바람 속에 바람으로... 몸의 존재가 사라진 의식의 존재로 오직 있었다.

눈을 떴다. 가볍다. 속눈썹이 열리자 내 동공으로 부처님 동공이 들어왔다. 나도 웃고 부처님도 웃는다. 부처님 백의에 거뭇거뭇 꽃이 핀다. 이런저런 사연을 모두 받아들였으니 부처님 속인 들 온전하겠나. 드러낸 속이 햇볕아래 위대한 역사가 되었으니 생의 마멸이란 역사의 초석이 되겠다. 드러내라. 속으로 썩으면 스스로 죽음이요 드러내면 고통이나, 고통이야말로 바닥을 차고 오르는 부드러움의 처음이니라... 해인의 말씀들을 상상하면서 내가 앉은 바닥을 보았다.


땡볕아래. 석조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들이 내 몸에 올라 기어 다니고 있다. 가만히 그들의 길을 응시했다. 개미에게 내 육신이 의지처로 여겨졌나 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개미의 생에 내 육신은 징검다리가 되었구나...


부처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따라 웃었다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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