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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떠나기 위해 떠나는지도 모른다

토문재 별곡

by 규린종희

사람의 생각은 예기치 못한 때에 느닷없이 바뀐다. 진료의뢰서를 펼쳤을 때 결막신생물이란 신생의 단어를 만났다. 날마다 죽어야 살아가는 일이 산 사람의 일상이라지만 낯선 물질이 퇴적한 몸이란 일순간 의식을 결박했다.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그다음을 풀어가야 한다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의식이 나를 붙잡았다. 두 아이에게 공문처럼 소식을 보냈다. 긴밀한 소식이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묶었다. 아이들의 감정을 신경 쓸 겨를 없이 이번에는 보험설계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기치 못해 심각한 상황이 닥쳐온다면 돈에 내 육신을 저당 잡히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오랜 기간 부어둔 보험이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으로 생각한 건 생의 정리였다. 지난 시간들에 발목 잡혀 남은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싶지 않아 최근의 시간들만 기록으로 두고 싶었다. 2019년까지의 기록은 뒤돌아보지 않고 없애버렸다. 전자 저장이란 것이 너무나 간편하여 삭제 버튼 한 번으로 말짱하게 사라지더라


아. 그렇지... 선물 같은 일이 있었지. 생의 특별한 순간에 간다는 땅끝마을을 ᆢ가장 뜨거운 팔월에 가게 되었다. 다글다글 익어가는 것들 사이에서 나는 다글다글 내 안의 소리를 만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름 비장하게 내게 온 상황들과... 내게 올 상황들을 생각하면서... 겉으론 단단해도 해거름이면 울컥울컥 감정이 요동쳤다. 다행히 악성은 양성으로 판정되었다. 그래도 수술을 통해 결막 정비를 해야 하기에 십일월 십일일 수술일정을 잡았다. 땅끝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끝을 맛본 셈이랄까...


해남... 생면부지의 그곳에서 지내게 될 삼칠일... 세상과 멀어지며. 또 세상과 가까워지겠지. 끝에서 만나는 처음은 어떨지 자못 궁금타... 계산해 보니 끝을 밟고 가는 그 길이 멀기는 멀다. 강호에 묻히고 싶었으나 끝내 왕의 부름을 받아 관동 팔백리를 걸었던 송강처럼 나는 나의 부름을 받아 칠백 리에 오를 게다.


오롯이 나를 알아보리라... 내가 모은 언어들을 놓아주고 날마다 새로운 언어를 담아야지... 언어의 성찬에 초대된 사람이 날마다 풀어내는 언어를 맘껏 주워야지...


해프닝으로 끝난 칠월을 건너 팔월이다. 어쩜 우리는 떠나기 위해 떠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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