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장소와 멀지 않은 곳의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위미해변의 팽나무 카페와 허니문하우스 그리고 왈종미술관, 이중섭미술관이 가까이 있으며 무엇보다 서귀포올레시장이 있어 숱한 여행자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한 곳이다. 호텔로 가는 리무진버스에 탑승했다. 공항을 우르르 빠져나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일부는 렌트차량의 대기장으로 쓸려나가고 있었다.
백백을 맨 남자가 앞서 리무진에 오른다. 그 남자 가방에 꽂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이클 센델 책이다. 책 중간쯤에 끼여 있는 연필... 하마터면 책갈피에 꽂힌 연필을 뽑을 뻔했다. 책을 들고 다니는 남자도 흔치 않지만, 연필로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사람은 더더욱 보기 힘들다. 줄 세운 회색 모직 바지에 검정 터틀넥, 무릎 위 15센티쯤에서 툭 떨어지는 검정코트, 블루그레이 톤의 가방을 멘 그 모습이 강하게 다가왔다. 버스 안 남자의 자리가 어디쯤인지 둘러보았다.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제주의 풍경은 어느 계절, 어느 시간이어도 좋다. 겨울 눈 내린 한라산을 보리라는 야심 찬 계획도 이번 일정에 포함시켰다. 강의와 강의 사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리라. 올레시장을 채울 젊은 언어에 귀기우리라 생각하는 사이 버스는 몇 군데 호텔을 들러 내려주고 또 태운다. 아차, 남자가 어디에서 내렸는가 보지 못했다. 조말론 블랙베리 향수처럼 가던 길 멈추고 한번 더 돌아보고 싶은 이미지였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호텔 프런트에 가방을 맡기고 강의 자료가 든 usb만 챙겨 강의 장소로 갔다.
‘삶이 무엇이냐 물어본다 해도 명확한 대답을 할 수 없지만 살아있다는 것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동사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며 팬데믹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사람과 사람, 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성찰이겠지요. 문학은 그 가운데서 나와 우리를 들여다보는 창으로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힘은 사랑 아닐까요’
이런 말들을 풀어내며 강의를 끝냈다. 팬데믹, 문학, 사랑, 성장... 이런 말들을 하면서 나는 그를 주제 흐름의 베이스에 두었다. 첫 번째 일정을 끝냈으니 이젠 허니문하우스에서 청량한 맥주를 마시고 싶다.
허니문하우스에서는 밤섬을 보며 한나절쯤은 앉아 있어야 한다. 당근케이크와 커피를 테이블에 두고 아껴먹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가 읽은 책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사회학에 눈을 열었고, 경제이론이 낯설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냥 내 눈에 보이는 풍경으로 있다는 사실만으로 좋았다. 허니문하우스에서 나는 그의 세계에 빠졌었고, 위미 해변의 카페에서 책 읽는 그의 모습에 정신을 뺏기지 않았던가. 그가 읽던 분홍표지의 시집 <사랑은 지옥에서 온 개>는 내게 여러 의미로 다가왔었다. 여행, 책, 커피, 바다, 글쓰기... 여러 결이 그와 닿았기에 보지 않아도 보였고 그래서 낯설지 않았다.
7년 동안 단 일곱 번 만났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감정의 밀도가 깊은 것은 날마다 통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눈앞에 없을 뿐 보고 있는 것과 같았으니... 그러나 어느 즈음부턴 분홍시집처럼 그의 일상에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그 빈도가 잦을수록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파고들었다. 애써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외로움이라는 감정이다. 이것은 안개처럼 나의 전부를 끌고 가기도 했고 그 속에 한동안 나를 매몰시켰다.
강의 일정을 핑계로 슬쩍 메시지를 띄운 것은 그냥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월이 되었으니 늘 그랬듯이 낯선 도시 낯익은 풍경으로 서 있고 싶었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건조해진 그의 시그널... 바닥으로 가라앉은 감정을 안고 허니문하우스로 가는 택시를 탔다.
한때의 영화가 사라진 파라다이스. 쇠락한 왕조의 궁성처럼 쓸쓸한 회랑에 멈춰 제멋대로 잔디가 자라난 마당을 들여다봤다. 수영장이었던 곳은 잡초가 무성하고 덜컹이는 테라스 문틀 사이로 뜯어내지 않는 낡은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영원한 것은 없으니... 우리는 파라다이스를 꿈꾸며 오늘을 걷고 또 걷는 것이겠지. 퇴적층으로 쌓인 생각들이 현무암 뚫린 구멍사이로 숭숭 빠져나왔다. 그에 대한 생각도 같이 흘러나왔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생각을 덜어내야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덜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생각을 물고 있는 것이니 차라리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서 차츰차츰 영역을 줄여갈 수 있겠지. 물병의 물을 모두 비우고 새물을 채울 것인가, 조금씩 새물을 넣어가며 자연스레 변화를 이끌어갈 것인가. 결국 선택은 내게 있는 것이다.
허니문하우스, 그와 내가 해마다 앉았던 자리는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 두리번거리다가 구석진 자리에 가 앉았다. 강의 후 오후니까 커피 대신 맥주를 마셔야겠다. 거품을 적절히 낸 맥주를 막 입술로 가져가는 그때, 리무진버스에 앞서 오르던 남자가 눈에 띄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