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무진 버스 뒷모습의 남자, 그 남자도 맥주를 마시는 중이다. 넓은 커피집에서 맥주를 마시는 단 두 사람이 남자와 나였으니 재밌는 우연이다. 몇 번 눈이 스칠 때마다 가벼이 목례를 건넸다. 이십여 분이 흘렀을까. 남자는 새로운 음료를 주문하려는 듯 데스크에 있다.
물기 빠진 감정에 촉촉함을 더하기에 맥주만큼 좋은 게 없다. 제주에일 민트는 5월 제주 물빛을 닮았다. 양손에 맥주를 든 남자가 내 앞에 서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 빈 의자에 손짓을 보냈다.
-맥주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리무진 버스에서 봤습니다...
-네...
-제주엔 어쩐 일로?...
-네. 강의... 겸하여...
-허니문하우스 자주 오세요?
-네...
나는 단답형 대답만 하고 있었다. 하긴 남자의 질문도 마찬가지다.
-학교 있습니까? 교수세요?
-아니요, 그냥 프리랜서 강사... 문학...
남자에게 대답을 하면서 나는 그와 왔던 때를 생각했다. 이런 나에 대해서는 아랑곳 않고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파라다이스 좋잖아요. 이젠 폐허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파라다이스를 간직한 곳이라 일 년에 꼭 몇 번은 다녀갑니다. 물론 허니문하우스에서 마시는 커피, 맥주도 좋고요...
남자가 가져온 맥주를 마시면서 나도 머리를 끄덕이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 속도만큼 남자도 말을 받아갔다.
-파라다이스 한 번 들어가 볼래요? 저는 파라다이스에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리뉴얼? 혹시 디자이넌가요?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로 온 겁니다
-그럼 혹시 오너와 친인척이라도?
-하하 그건 더욱 아니고요...
그러니 더욱 호기심이 갔다. 말쑥한 남자, 책을 들고 다니는 남자가 파라다이스에서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궁금함이 증폭되었다. 그는 내가 묶는 옆 호텔에서 5일간 머물 거라고 했다. 나는 그가 묶는 옆 호텔에서 7일간 머물 거라 말했다.
-호텔로 가기 전, 올레 시장 탐험은 어떤가요? 시장 가운데서 술 한 잔 같이 하실래요? 곧 저녁식사 시간인데.. 선약 없으면요...
남자가 던진 제안을 의심 없이 덥석 받았다. 여행지에서의 용기라고나 할까. 낯선 곳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묘한 용기가 생긴다.
올레시장은 여행자들로 넘쳐났다. 팔도의 억양들이 한데 섞여 말의 군무를 보는 것 같았다. 오징어 뱃속에 흑돼지를 갈아 넣어 부친 전을 안주로 한라산 소주 21도 1병과 제주 막걸리 1병을 나눠 마시며 서로의 말을 했다. 호객을 하는 상인의 목소리와 여행자들의 웃음소리, 발소리 등이 교차하는 길 한가운데 우리는 섬처럼 앉았다.
사람들 오가는 시장 가운데서 음식을 먹는다. 처음 보는 남자의 눈자위가 붉어질수록 내 입꼬리도 귀에 걸리고 있었다. 술잔이 늘어날 때마다 사람들의 소리보다 남자의 말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표정으로 보았고 남자 또한 내 술잔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다음 강의까지 며칠 여유가 있으니 같이 다니는 건...
-그럴까요?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란 낯선 사람과 낯설지 않게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긴 낯선 도시에 가면 이전에 없던 용기가 생긴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내일 저는 1100 고지로 가는 버스를 탈 건데... 거기 눈 만나러 가려고요...
-겨울 한라산은 눈이지요 그럼요... 교통편은 알아요? 중앙로터리 버스 정류장에서 10시에 만나면 되겠지요. 거기서 버스 타고 환승해야 해요. 1100 고지 가려면...
남자와 헤어진 밤은 빨리 가지 않았다. 저녁을 술과 안주로 대신한 탓에 깊은 밤,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커피를 내려 마시고, 귤 두 알을 까먹었지만 허기가 몰려온다. 갑자기 그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있다. 전화기를 열었다. 조용하다.
그의 메시지엔 그의 음성이 들어있었다. 음성에 묻은 있는 온기도 함께 보였다. 출근길에 보내오는 메시지엔 샤워를 막 끝낸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었고, 퇴근길 메시지엔 조말론 블랙베리 향수 같은 체취가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조말론 향수를 그도 좋아했으니 향기에 대한 감각이 특별한 내게는 향기로 기억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잠 못 드는 제주의 밤엔, ‘내 생각하지 말아요, 뭘 하든 나에게 말해주지 않아도 돼요, 그냥 놀아요...’라고 말한 그의 목소리가 더욱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이상하게 그 선명함은 물리적 간격보다 더 넓은 간격을 벌리고 있었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관계를 이어오면서 통속의 관념에 묶이고 싶지는 않다는 그런 프레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친밀도를 느슨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날이 밝으면 눈 덮인 한라산, 그 순백의 순간을 걸으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보고도 싶었다. 하필이면 처음 보는 남자와 동행이 되어....(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