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說(야매소설)

파라다이스는 그 순간에 고여 있었다. 5

by 규린종희

커튼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온통 검은빛이다. 상념이 꼬리를 물어 의식이 잠들지 못한 채로 두어 시간 눈을 붙이다 떴다. 비다. 비가 오고 있다. 평지엔 비지만 지금쯤 1100 고지엔 눈이 오겠지. 갑자기 남자와의 약속 시간이 멀게 보였다.


눈이 오는 한가운데 있고 싶었다. 약속 없이도 오가는 시간처럼 약속 없이 만난 남자의 인상이 시트 끝으로 몰려들었다. 엄지발가락으로 힘을 보냈다가 다시 머리끝까지 받아들이기를 반복했다. 살아있구나. 살아있어 반가운 아침 비가 온다. 그러나 나는 비를 눈이라 부르며 시간을 삼키고 있었다.


구운 빵 냄새가 조식을 먹는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온다. 연한 핑크빛이 도는 연어 몇 점에 케이프를 올려 접시에 담았다. 연어 빛깔이 도는 살 냄새가 설핏 떠올랐다. 순간 알 수 없는 설렘으로 근육이 꼼지락거렸다. 보틀에 더운물을 담았다.


남자를 만나기 전 호텔 편의점에서 한라산 21 미니를 챙겼다. 눈 내리는 산, 눈 덮인 산속에 기꺼이 고립되어 줄 요량으로 약속장소로 간다. 굵지 않는 빗줄기를 우산으로 받으며 중앙사거리 정류장으로 가는 길, 저기 남자가 보인다. 어제와 달리 남자는 트레킹 복장이다. 마치 이런 날을 예견한 듯한 남자의 여유가 좋다.


1100 고지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중앙사거리에서 탑승, 중문사거리에서 240번 버스로 환승해야 한다. 버스 안 교통방송에서 한라산 대설주의보... 1100 고지, 5,16도로, 전면통제 앵크 멘트가 쏟아진다. 설마.. 버스까지 통제할까 했지만 대설주의보 속엔 그 어떤 것도 허락지 않는 것이 또한 산이다.


- 눈 한라산을 보고 싶다 했는데 어째요. 교통 통제네요...


나를 보는 남자의 눈빛에 아쉬움을 얹은 장난기가 섞여있다.


-우리 비 속에 다니지 말고 허니문하우스 어때요. 파라다이스 들어갈 일도 있고요..

-파라다이스는 출입이 안 되잖아요. 폐허인데... 하긴 궁금하긴 해요. 가요. 우선은,,, 그곳에서 가서 다음일정을 정해보기로...


삶이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매 일상을 긴장하며 걷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걷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니까.


변화무쌍한 일기, 품을 내어주지 않는 산, 그럼에도 눈앞에 놓인 길에 대한 선택의 딜레마...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의식들... 나는 갑자기 남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남자에 대한 궁금함이 커져갈수록 그에 대한 생각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생각을 비우는 것은 다른 생각을 넣을 때 가능한가 보다.

-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천제연 1 폭포, 2 폭포까지 빗속 산책은 어떨까요


사람의 소리가 없는 우중의 산책길. 숲은 아득한 원시의 흙냄새를 토해냈다. 떨어지는 물이 없는 폭포는 폭포가 아니라 그냥 연못이었다. 청빛을 깊이 품은 쪽빛의 연못 그래서 천제연인가 보다. 서로의 전화기로 사진을 찍어주며 파라다이스엔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물소리를 들으면 소변이 하고 싶어요. 저기 천제연을 보고 있으니까 더 그런 걸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크게 웃었다. 뭐랄까 말쑥한 중년의 남자에게서 아이의 모습을 봤다고 할까. 소변을 하고 싶다는 말이 ‘주변을 지켜주세요’라는 말로 들렸다.


-내가 망볼게요....


남자는 말이 끝나기 전에 벌써 지퍼를 열어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비 소리와 오줌소리 사이 남자와 내가 서 있다. 아이처럼 공중을 향해 흩뿌리며 소변을 보더니 이쪽을 보며 히죽 웃는다. 그 모습에 또 웃었다. 일을 끝낸 남자가 몸을 흔들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갑자기 편안했다. 오래전부터 본 사람처럼. 그에게 가졌던 망설임이나 조심스러움을 남자에게는 가지지 않아도 될 만큼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런 의외성에 놀라면서도 한편 싫지 않았다.


허니문하우스엔 사람들로 빼곡했다. 에스프레소 두 잔과 당근케이크를 주문했다. 제일 구석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석진 자리는 카페에 온 사람들을 또 다른 풍경으로 볼 수 있어 좋다. 마침 남자의 이야기를 집중하여 듣기에도 맞춤이다.


내가 먼저 허니문하우스를 좋아하는 이유를 남자에게 말했다. 그 속엔 당연히 그에 대한 이야기가 같이 들어있다.


-고상한 척 표현하지 못하고 지나온 시간이 오히려 서로를 멀게 한 것 같아요...

내 말에 남자는 그냥 머리만 끄덕였다. 주저리주저리 엮이어 나오는 이야기를 그냥 들어주는 남자의 존재가 순간 아늑한 바다처럼 다가왔다. 감정이 깊어, 가끔 젖은 목소리를 내도 남자는 나를 보는 대신 두 손으로 커피 잔을 잡거나, 뜨거운 물 한 모금을 삼키며 머리만 끄덕였다. 그 편안함에 기대어 한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 그쪽은 파라다이스에서 할 일이란 게 뭘까요?


남자는 말없이 에스프레소 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엄지와 검지로 손잡이를 잡고 입술로 가져갔다. 식은 커피 그림자가 남자의 입술에 묻었다. 그러고도 한참 후 입술을 뗐다.


-사실은 파라다이스를 가지러 왔습니다. 파라다이스를 가져가면 다시 파라다이스를 찾을 것 같아서요...

표정 없이 그 말을 내어놓고선 한동안 또 말이 없다. 파라다이스를 가지러 왔다니.... 때로 앞뒤 자른 말을 가감 없이 들어줄 한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있다. 남자가 내게 해준 것처럼 나도 남자의 말을 기다리며 그냥 가만히 있었다. 세상이 모두 등 돌린듯해도 하나쯤은 내게 굽은 등 내밀어 준다고 시인은 말하지 않았나. 나는 시인의 말을 떠올리며 남자에게 선암사 해우소 등 굽은 소나무처럼 있기로 했다.

- 이해 안 되지요


커피 잔이 비고, 뜨거운 물을 두 번 받아오자 남자가 주머니를 털어내듯 말했다.


-어떤 삶도 이해의 대상은 아니지요. 어찌 타인의 삶을 이해라는 프레임으로 볼 수 있는가요. 이해라는 말 자체가 지극히 자기중심적 사고라고 생각해요.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다른 길을 같이 걸어갈 뿐, 같이 가는 길은 아니니까요. 나도 그가 아니듯, 그도 내가 아닌데 이해하는 프레임은 자기식으로 본다는 뜻이잖아요. 그 순간 기대가 생기고 서운함이 따르고 그러다 오해가 생기면 결국 균열이 생기잖아요.

-아! 그 말 좋아요. 어떤 삶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


남자에게 말을 하면서 나는 그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에게 닿았던 내 마음이 그랬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것, 타인에게 말을 거는 것은 결국 나에게 말 걸기였음을...


-파라다이스에서 허니문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보낸 객실 테라스에 달린 전등갓을 가지러 왔습니다. 태양의 미소를 닮은 청동 전등갓에 담긴 파라다이스를 가져가면 다시 그때의 파라다이스를 만날 것 같아서요.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그때 파라다이스는 말 그대로 파라다이스였습니다.

-.......

-정말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만큼은 영원하다고 믿었습니다. 세상이 그토록 화려하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테라스 청동 전등갓 문양이 태양의 미소를 닮았어요. 빙긋이 벌어진 입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아래 그 밤. 그녀의 머리카락을 빠져나온 바람에 묻은 향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그 향기만 생각하면 온몸의 감각이 서니까요.

-어떻게 가지고 갈 건가요?

-우선 객실 테라스로 가서 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지요. 지난번 왔을 때 보니 충분히 가져갈 수 있겠더라고요...

-내가 도와줄게요. 아까 소변볼 때 망봐준 것처럼... 내가 망봐 줄게요...


나는 남자와 위대한 공모자가 된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의 파라다이스를 곰곰 생각해 봤다. 나는 나의 사람이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했고, 남자는 그의 사람이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테이블 위로 불렀다. 따지고 보면 같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의 릴레이를 펼친 것이다.


결승전을 통과한 후 풀썩 주저앉은 마라토너처럼 이야기의 흐름이 멈췄다. 습관처럼 커피 잔을 들었다. 마른 잔을 들고 나는 한참이나 밤섬을 봤다. 한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 한 번 가볼까요. 어떤 일을 도모할 땐 사전답사가 중요하잖아요. 손으로 할 수 있는지, 연장은 필요 없는지... 어떤 연장이 필요 지... 취득했을 때 이동은 어떻게 할 건지... 이런 일은 한 번에 완수해야지... 실수는 실패가 되기 쉽잖아요.

-하하하 그럼 공모하는 겁니다. 어째 사용하는 용어가...

-전직이 의심스러운가요? 우선 가봅시다. 사전답사라고...


비에 젖은 파라다이스는 을씨년스러웠다. 청동부조물엔 새들의 배설물이 굳어 석회가 되었고 하얀 외벽엔 검은 이끼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테라스에 깔아 둔 나무는 터진 채로 삭은 속을 까발리고 있으며 웃자란 야자수 마른 잎은 비에 젖은 채로 서걱대고 있다. 한 때 여행객들의 웃음소리와 와인잔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했을 레스토랑은 퇴락한 문설주만 덜컹이고 있다.


-인디아나 존스가 된 것 같아요.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 뭔가 드라마틱한데요...

-하하하 상상력이 뛰어나시네요. 그 말을 들으니 영화의 장면 속에 있는 것 같네요. 저기예요. 저의 허니문하우스이자 제가 찾는 파라다이스...


남자가 가리키는 객실 테라스엔 그의 말처럼 태양의 미소를 한 청동 전등갓이 이끼 낀 하얀 벽에 박혀있다. 태양신을 숭배한 민족이 사용하던 문양처럼 보였다.


사람들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기억할 조형물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푸른 웃음은 가시지 않겠지. 남자의 지금이 어떠하든 찾고자 하는 파라다이스는 늘 지금이겠구나. 남자가 벽에 걸린 조형물을 확인하는 동안 나는 나의 파라다이스 속에 그를 세웠다.


5월 어느 날인가. 그는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속을 보이며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 먼 거리에 있는 우리가 왜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불가’라며 호수에 툭, 툭 돌을 던지듯 말했다. ‘좋으니까 그냥 좋으니까요’라고 낮은 소리로 말을 했지만 순간, 내가 그의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

이후 자주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유효 만료기간이 다가오는 신용카드를 생각했고 수없이 놓아주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이끌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를 놓아주려면 그를 처음 만났던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 위미해변 카페, 오래된 팽나무에 주술처럼 걸어두었던 어떤 의미를 풀어주어야 한다. 어쩌면 그에게로 향했던 생각에 틈을 만들어야 그도 나도 가벼울 수 있겠다.


그와 나는 서로의 세월 속에 집을 지어야 할 사람. 때로는 타성에 빠져들면서도 범상해야 할 관계. 진솔하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전하되 늘 새롭게 노력해야 하는 사람들. 감성으로 그를 사랑할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더욱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너절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틈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새벽의 틈으로 아침이 오듯이 그 틈으로 새로운 무엇이 흔들리며 일어서길 바라는 것이다. 가끔 의욕이 없고 기운이 떨어지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그리움 때문이었나 보다. 열엿새 달처럼, 초이레 달처럼... 시간 속에 채워지는 달처럼... 불쑥불쑥 솟구치는 그리움은 어쩔 수 없을지라도 이제는 다가오는 유효기간 앞에 재발급을 받을 건가 아닌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 나사가 풀려요. 그런데 하나가 휘어졌어요. 도구가 필요해요.

남자의 낮은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래 파라다이스로 가는 길은 애가 타는 법이지. 사전답사였으니 설령 나사가 풀려진다 하더라도 남자에게 지금 가지고 가는 것은 말릴 생각이었다.


한 번에 성사되는 일이 좋기는 하나 남자와 함께 하면서 나누는 시간이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공범자처럼 즐겁다. 묘한 즐거움을 좀 더 갖고 싶은 욕망이 비집고 들어온다. 비를 맞으며 곁으로 다가온 남자의 어깨에 우산처럼 다가갔다.


-내일 오전엔 강의가 있어요. 오후엔 팽나무 카페에 가야 해요.

-만날 사람이라도?...

-할 일이 있어요...


남자가 말했던 방식으로 나도 남자에게 말을 했다. 사흘 뒤 공항으로 가야 한다는 남자의 말은 내일이라도 태양의 미소를 떼고 싶다는 뜻이다. 나는 모레는 도와줄게요... 잘라 말하며 돌아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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