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thin ( ) line> 공연에서 다뤄졌던 키워드와 이슈 2
퍼포머들은 최대한 관객을 의식하지 않는다. 객석과 무대의 분리가 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공간에 섞여 있지만 관객의 시선에 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각 이어폰을 끼고 본인의 상태에 빠져 외부를 의식하지 않는다. 반복 연습을 하다 보면 갑자기 튀어나오는 말들도 있으며 거친 숨소리는 일종의 노동의 현장이다. 관객은 그들이 무엇을 듣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모두가 같은 음악을 듣는지, 다른 음악을 듣는지 알 수 없다. 가끔씩 각 퍼포머들이 움직이는 영역에 배치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음악이 새어 나오다 끊길 뿐이다. 극장을 감도는 사운드는 마치 우주나 게임의 노이즈 같다. 은은하게 울리는 노이즈 사이로 라디오 같은 블루투스 또는 각 공간의 스피커에서 크고 작게 퍼포머들이 듣던 음악이 나오다 끊긴다. 마치 접속이 되다 끊기는 듯해서인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동할 수 있으며 외부에도 나갈 수 있고 다시 입장도 가능하다. 공연 중 받은 문자에서 제안하는 내용들을 따라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이머시브가 이뤄지는 다양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어쩌면 이 모든 상황이 낯설거나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낯선 것을 자신의 것을 바꾸는 힘과 불편함으로 이것을 거절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자신의 이머시브를 찾거나 극장 내 새로운 자신만의 장소를 찾은 관객은 호평을, 이를 찾지 못하고 불편함으로 남은 관객은 혹평을 남겨 공연의 호불호가 분명하게 나뉘었다. 공연 종료 후 극장의 공연 티켓 예매 홈페이지에 한 관객의 혹평으로 인해 극장이 사유서까지 써야 하는 상황도 맞이하였는데, 그 혹평의 이유는 본인이 잘못 이해한 공연의 내용이었으며 본인이 불편했다는 것이었다. 극장은 서비스의 영역에서 이에 대한 사과와 해명을 해야 했고, 대화가 단절된 관계에서 그 피로감은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다. 낯선 것을 마주해도 괜찮지 않을까? 불편함은 무엇으로부터 인한 실망이었을까. 아마 전통적인 공연의 형식이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혹평이었다. 낯섦과 불편함의 경계에서 이머시브가 이뤄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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