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밭과 평상
비닐하우스 지붕이
가까워질수록
셋의 속도는 조금씩 느려졌다.
그래도
이번엔 멈출 이유보다
가야 할 이유가 더 분명했다.
국도 옆으로
짙은 초록이 길게 펼쳐졌다.
덩굴이 낮게 깔린 밭 사이로
모자를 눌러쓴 아저씨 하나가
걸어 나왔다.
셋은
자전거에서 내렸다.
아저씨는
셋을 한 번 보고,
자전거를 보고,
가방을 보고,
다시 얼굴을 봤다.
“왜.”
질문은 짧았다.
진용이 먼저 말했다.
“저 아래 과일가게 아저씨가
여기 한번 가보라고 하셔서요.”
아저씨 표정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무환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혹시
일 좀 할 수 있을까요.”
아저씨는 대답 없이
셋을 다시 훑었다.
대진이 급하게 덧붙였다.
“힘쓰는 건 자신 있습니다.”
진용이 바로 말했다.
“시키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아저씨가 밭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수박 날라야 되는데,
해보면 안다.”
대진이 수박들을 한 번 보고
작게 말했다.
“벌써 알 것 같은데요.”
아저씨는 못 들은 척했다.
“수박 깨뜨리면
너네 돈에서 깐다.”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돈은 많이 못 준다.
그래도 할래?”
이번엔
셋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아저씨는 장갑 몇 개를
툭 던져 줬다.
“그럼 입보다 손부터 써.”
⸻
수박 나르기는
보기보다 힘들었다.
하나를 품에 안으면
겉은 차가웠지만
안은 단단했다.
두세 번 옮기고 나니
팔보다 허리가 먼저 당겼다.
대진이 수박을 끌어안고
비틀거렸다.
“아저씨…
이거 수박 맞죠?”
헐떡이며 말했다.
“제 인생보다 무거운데요.”
아저씨가 말했다.
“인생이 가벼우니까
수박이라도 무거워야지.”
대진이 헐떡이며 웃었다.
“덕분에
저희 인생도 좀 무거워질 것 같습니다.”
셋은 다시 들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진용이 웃다가
수박을 놓칠 뻔했다.
“야, 조심!”
셋이 동시에
수박을 붙잡았다.
아저씨가 멀리서 말했다.
“야, 거기.”
셋이 얼어붙었다.
“그거 떨어뜨리면
오늘 일한 거 없다.”
대진이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원래도 없던 것만
계속 깎이네.”
⸻
조금 뒤
무환이
수박 하나를 두드렸다.
통.
통.
귀를 가까이 댔다.
아저씨가 물었다.
“왜 자꾸 두드리냐.”
“이건 아직이에요.”
“뭐가.”
“소리가 비어요.
아래가 덜 찼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아저씨가 피식 웃었다.
“그럼 맛있는 걸로 하나 골라봐라.
보너스다.”
무환이 덩굴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흙을 발로 살짝 밀었다.
수박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오늘 밤.”
아저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해가 기울 무렵
일은 끝났다.
아저씨는
구겨진 지폐 몇 장을 건넸다.
셋을 한번 보더니
툭 말했다.
“배고프겠다.
어서 먹고 씻어라.”
잠시 뒤
양은 대접에 밥이 나왔다.
된장찌개,
김치,
식은 반찬 몇 가지.
셋은
“잘 먹겠습니다.”
한마디만 하고
바로 먹기 시작했다.
말이 거의 없었다.
고개를 들 틈도 없이
밥부터 비워 갔다.
아저씨가 힐끗 보고 말했다.
“천천히 먹어라.
체할라.”
대진이 밥을 삼키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로도
셋은 말없이 먹었다.
배가 먼저
대답하고 있었다.
다 먹고 나서야
셋은
호스 앞으로 갔다.
무환이 먼저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아—
물줄기가 곧게 뻗었다.
대진이 먼저 등을 들이밀었다.
“아, 잠깐만.
천천히—”
무환은 못 들은 척
그대로 등에 물을 뿌렸다.
대진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야, 개차가워!”
진용이 옆에서 웃었다.
“엄살은.”
대진이 바로 돌아봤다.
“좋아.
이 물 맞고 반응 없으면
오늘 빨래 내가 다한다.”
무환이 말했다.
“뿌려봐.”
진용이 호스를 들었다.
쏴악—
무환은 처음엔
턱을 들고 버텼다.
어깨가 한 번 움찔했다.
입술도 잠깐 붙었다.
대진이 웃기 시작했다.
“왜.
할 만하지?”
그 순간
진용이 호스를
엉덩이 쪽으로 더 올렸다.
무환이 바로 소리 질렀다.
“아악!
야 씨, 개차가워!”
대진이 배를 잡고 웃었다.
“끝.
먼저 소리쳤다.”
잠깐 뒤
평상 한쪽 빨랫줄에는
젖은 티셔츠랑 양말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무환이 혼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밤이 되자
별이 생각보다
많이 떠 있었다.
무환이 수박을 쪼갰다.
짧은소리가 났다.
붉은 속이 드러났다.
셋은 말없이
한 조각씩 들었다.
대진이 한입 베어 물고 말했다.
“야…
이거 진짜다.”
씨를 퉤 뱉는 소리가
풀숲 쪽으로 날아갔다.
셋은 말없이 먹었다.
삼각김밥보다
훨씬 달았다.
한동안은
씨 뱉는 소리만
작게 났다.
풀숲에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대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야.”
“응.”
“우리
내년에도 보냐.”
무환이 말했다.
“뭘 또 그렇게 멀리 보냐.”
대진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아니 그냥.
갑자기.”
잠깐 조용했다.
진용이 하늘 보며 말했다.
“군대 갔다 오면
다 달라져 있긴 하겠지.”
대진이 씨를 뱉었다.
“그러니까 묻는 거지.”
무환이 수박 껍질을 긁다가 말했다.
“달라지면 달라진 대로
또 보면 되고.”
진용이 낮게 말했다.
“나 사실
중간에 몇 번은
그냥 집 갈까 싶었다.”
대진이 바로 말했다.
“나도.”
무환이 말했다.
“나도.”
대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근데 아무도 말 안 했네.”
진용이 말했다.
“누가 먼저 꺼내면
진짜 갈 것 같아서.”
무환이 말했다.
“그래서 버틴 거지.”
바람이 한 번
평상 밑을 스쳤다.
대진이 말했다.
“야.”
“왜.”
“나중에
누가 먼저든
한번 가자 하면
빼지 마라.”
진용이 말했다.
“상황 봐서.”
대진이 웃었다.
“아, 정 없다.”
무환이 말했다.
“그래도 가긴 갈걸.”
잠깐,
셋 다 말이 없었다.
대진이 작게 말했다.
“그럼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