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터미널역 5번 출구에서 시작한 피천득 산책로의 나무는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얼굴로 서 있다. 잎을 다 털어낸 나목은 오히려 당당하고, 가지의 선은 망설임 없이 하늘로 뻗어 있다. 비워낸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형태, 그 앞에서 한참 머물렀다.
잎이 무성할 때보다 가지의 선은 또렷하고, 하늘과 맞닿은 실루엣은 한 편의 드로잉 같다. 시선은 자연스레 하늘로 향했다가, 다시 땅으로 내려왔다. 자연은 덜어냄으로써 본질적인 상태로 회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맞은편으로 길을 건넜다. '당신의 콧노래를 들려주세요' 허밍웨이(Humming Way) 산책로 이정표가 마음까지 싱그럽다. 찬 기운 속에서도, 걸음은 가벼웠다. 함께 걷는 언니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흔셋이라는 숫자가 무색하게, 두 사람의 걸음에는 어떤 무게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 경쾌함은 덜어낸 끝에서만 얻어지는 것이었으리라.
나는 뒤를 따라갔다. 그들의 뒷모습은 겨울 나목과 닮아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선, 흔들림 없는 중심. 메이지 않은 가벼움이란 이런 것일까. 책임과 시간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삶을 돌아보았다. 아직도 놓지 못한 삶의 무게, 일상을 무겁게 만드는 긴장감을 바라보았다.
동작역 1번 출구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우면산에서 발원하여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반포천이 얼어 있었다. 언니들은 얼음 위를 가리키며 멈추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느끼는 표정에는 조급함도, 과장도 없었다. 얼어붙은 하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겨울이 봄을 준비하듯, 멈춘 듯 보이는 나의 시간도 어딘가에서 흐르리라.
바다 같은 한강을 마주했다. 우리는 사진 찍느라, 꽁꽁 언 손을 녹이려고 동작대교 전망대 카페로 향했다. 노을카페에서 따뜻한 생강차를 마시며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겨울빛을 묵묵히 응시했다. 무엇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 시선,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자유일지도 모른다.
서래섬에서 한강은 짙푸른 파랑을 머금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강물결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겨울나무가 얼마나 멋스러운지 이야기했다. 화려함이 아닌, 비움 이후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였다.
세빛둥둥섬을 지나서, 한강 물길 따라 걷고 걸었다. 간간히 런닝하는 이들이 지나갔고 혹한에 산책하는 시민도 드물었다. 잠원한강으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 위에서 마음까지 출렁였다. 흔들림은 생동이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이렇게 울렁이는 떨림으로 다가온다.
서울웨이브아트센터 카페 넓은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세 여자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물멍, 빛멍, 하늘멍.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 공간에서, 존재는 그 자체로 시가 되었다. 애쓰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그대로 편하고, 그저 좋았다.
해가 기울 무렵,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 언니들은 여전히 경쾌하게 걸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도 저렇게, 삶을 오래 살아낸 사람만의 겸허함과 가벼움을 지니고 싶다. 함께 걷고, 함께 바라보고, 때로는 침묵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