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
뚝배기에 물을 넣고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라
나는 그게 바로 비법인가 해서
먹어보니 영 밍밍하네
김치는 국물을 꼭 짜내고
채소도 함께 넣고 팔팔 끓여
그리고 청국장 한 덩일 넣고
두부를 넣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게 있어
엄마의 비법은
다시다
얼마나 넣냐면
적당히
적당히
적당히
마침내 보글보글 끓어
살짝 넘치는 뚝배기를
바라만 봐도 엄마 생각
한 숟갈 떠서 먹어보네
그냥 바라보기만 할걸
내가 끓인 건 맛이 없네
어떡해야 그 맛이 날까
적당히라는 건 얼만큼인 걸까
엄마의 비법은
다시다
얼마나 넣냐면
적당히
엄마의 비법은
다시다
얼마나 넣냐면
적당히
적당히
적당히
우리가 접하는 현대음악은 서구권에 기원을 두고 있다. 동양의 현대음악은 서양의 음악 스타일을 수용하여 동양의 감각으로 새롭게 풀이한 것으로 봐야한다. 특히 재즈는 동양적 풀이에 난점이 많아 이국적 색이 짙다. 밴드 [개인플레이] 곡의 주 장르는 재즈/포크/블루스다. 위 곡의 가사 첫마디에선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인 뚝배기가 등장하며 연주와의 부조화를 자아낸다. 뒤이어 멸치, 다시마, 김치 등등 자연스레 그 맛이 연상되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따른다. 뚝배기에 담긴 음식은 엄마가 끓여줬던 청국장의 재현물이다.
성인이 되어 독립을 하고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 보면 불현듯 엄마나 아빠가 해줬든 음식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 맛은 여러 식당을 찾아도 감각되지 않고,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습득한 레시피가 남아있더라도 완전히 재현되지 못한다. 그럴 때면 부모님에게 전화를 건다. 딱히 연락을 못할 정도로 바빴던 건 아니지만 마지막 연락이 몇 주전이다. "여보세요?"하고 좀 어색하게 인사를 하면 일상에 묻혀 잊고 지냈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오랜만에 들린다. 나를 향한 그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밝은 것이었다.
화자는 도통 그때의 맛이 나질 않는 청국장을 수습하기 위해 엄마에게 그때의 레시피를 묻는다. 하지만 엄마의 답변은 다름 아닌 '다시다'다. 다시다는 감칠맛을 내기 위한 가루 형식의 조미료다. 그러면 얼마 큼을 넣어야 하는지 다시 묻는다. 적게 넣으면 밍밍할 테고, 또 많이 넣으면 못 먹을 정도로 비리고 짜게 된다. 여기서 엄마의 답변은 그냥 '적당히'다.
요리라는 건,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최적의 맛을 내기 어려운 대상이다. 이 때문에 식당에선 모든 손님에게 같은 최적의 맛을 제공하기 위해 수치화 + 정량회 된 레시피대로만 요리한다. 하지만 가정에서 먹는 음식들은 그렇지 않다. 몇 그램의 다시다를 넣어야 하는지 정량화된 레시피는 없다. 그냥 뭐든 간에 적당히 넣으란 엄마의 말이 전부다.
정해진 레시피가 있더래도 요리사의 조리법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지듯이, 우리 인생도 성경이나 좋은 구절들을 제 입맛대로 해석하고 실천한다. 남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을 온전히 수행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남을 완전히 배격하고 자신만 생각해서도 아니 될터고, 오로지 남을 위해서만 살아도 아니 된다. 결국 경험에 근거한 적당한 지점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처럼 말이다.
화자는 밍밍한 청국장을 먹어도 보고 비리고 짠 청국장을 먹어도 봐야 한다. 그리고 청국장에 유습해질 때, 최적의 맛을 위해 적당히 다시다를 넣으며 엄마의 청국장이 아닌, 엄마의 느낌이 담긴 자신의 청국장을 요리한다. 그리고 레시피를 묻는 이들에게 엄마와 똑같이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냥 다시다를 적당히 넣으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