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gnes Jan 08. 2023

나에게 자동차란

나를 키운 공간

나는 살면서 매우 많은 시간을 길에서 보냈다.


일단 대학이 시작이었다. 경기도에 살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나는, 4년 간 하루 중 약 3시간~4시간을 탈 것 속에서 보냈다. 차가 많이 막히는 날은 2시간 꼬박, 뭔가 변수가 생겨 적게 걸린 날은 1시간 30분 후 학교에 도착했다. 아침을 먹고 나서 학교에 가면 다시 배가 고팠고, 아침에 일어나 화장을 한 후 학교에 가면 이미 수정 화장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눈이 많이 오거나 비가 많이 오는 날. 눈이 많이 오는데 컨디션까지 안 좋았던 어느 날은, 가다가 차에서 내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날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강의 시간을 몰아서 신청해 하루라도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을 만든다거나 그런 잔머리는 쓸 줄 몰랐다. 그냥 매일이, 하루하루가, 나에겐 여행이었다.


회사 또한 그렇게 다녔다. 대학만큼 멀진 않았지만 하루 중 2시간~3시간은 길에서 보냈다. 대학 다닐 때보다 적게 걸린다면 그건 모두 오케이였다. 나는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이 정도야 뭐. 서울 시내에 살아도 강서에서 강동으로 간다거나, 강남에서 강북으로 간다면 나 정도는 걸리잖아.' 그런 생각을 했다. 서른이 넘으면서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내가 삶을 주체적으로 산다면, 독립해 회사 근처에 살 수도 있을 것이고(물론 경제적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회사를 얻을 때 거리를 가장 우선순위에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결혼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회사 앞에서 살진 못했지만, 임신 기간 동안은 회사 근거리에서 다닐 수 있게 집을 옮겼다. 그때쯤 대중교통이 너무나도 지겨워진 나는, 임산부가 되어 지하철을 타고 다니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매일 택시로 다닐 수 있는 거리로 이사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나는 다시, 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친정 근처로 돌아왔다. 회귀.


그리고 운전을 시작했다.

차 안에서 화장하고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라디오를 듣는 삶이 시작됐다. 10년 째다. 운전을 하면서 조금 살은 쪘지만, 놀랄 만큼 덜 피곤했다. 짐이 많아도 됐고, 날씨가 추워도 괜찮았다. 자동차란 정말 편한 물건이었다. 출근길에 커피숍 한번 들르기 어려워 차가 짐스러울 때도 있었지만, 자가용이란 정말 신세계였다. 무엇보다 아무리 피곤해도 운전은 가능했고,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더워도 자동차는 날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나만의 시간이 생겼다.

아침 일찍 운전대를 잡으며 라디오를 켜면, 비로소 거기에서 나는 맑은 정신이 됐다. 일단 자동차를 벗어나면, 회사의 내 자리에 앉으면, 집 출입문을 열면, 나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과 일들. 중요한 일부터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일들의 범람인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나를 살려준 건 우습게도 기나긴 출퇴근 시간이었다. 길에서 나는 많은 결정을 했다. 퇴사할 결정을 했고, 병원에 가 볼 생각을 했고, 시어머니를 돌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상사에게 뭐라 항의할지 생각해 냈고, 후배를 어떻게 다독일지 고민했다.

그리고 계절을 느꼈다.


얼마 전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면서, 지긋지긋했던 내 대중교통 시절을 떠올렸다. 난 지금도 버스랑 지하철이 싫다. 하지만 동시에 내 자동차가 떠올랐다. 이젠 더 이상 대중교통은 안 되겠다, 버스와 지하철을 계속 타야 한다면 난 그냥 퇴사하고 가난한 삶을 살겠다. 마음먹었는데, 운전을 하게 됐다.


운전이 나를 더 일하게 했지만, 어차피 더 일할 운명이라면 덜 피곤하게 라도.

운전을 한다고 해서 출퇴근 시간이 절대 줄진 않는다. 출퇴근 시간이 긴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그 시간을 나는 곧 즐기기 시작했고, 이렇게라도 주어진 나만의 시간에 안도하며, 점점 더 많은 것을 하게 됐다.

나의, 소중한 자동차 안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나에게도 동네 책방이 생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