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염혜란 배우는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나는 명랑한 사람이라 단단히 말한다. 어떤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난처하고 난처한 것은 주변인의 시선이다. 꼭 주변인의 눈치를 보지 않더라도, 주변에 사람이 있으면 나는 덜 자연스러워진다. 극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폐쇄된 공간을 싫어하는 것도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 곁에 있으면 영화에 몰입되지 않아서다.
사는 게 너무 팍팍할 때, 나와 너의 명랑한 행동은 하루를 보내는 데 아주 많이 도움이 된다. 명랑할 이유가 없지만, 명랑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으므로. 20년이 넘는 직장생활동안 나는 항상 명랑했다. 지금도 알고 그때도 사실 알았던 것이, 나의 명랑함이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시절이 우울할 때는, 명랑하기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하루가 보내지지 않아서 스스로 명랑하려 노력했다. 처음에는 그냥 팍팍한 일상에서 작은 유머라도 찾아 현실을 견뎌보고자 했던 것뿐인데, 나중에 보니 그 때문에 나는 명랑해져 있었다. 무슨 일을 시켜도 명랑했던 나에게 한 상사는 "너밖에 없다. 너 여기서 임원 달겠다."라고 했고, 어떤 동료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분명 한 자리 했겠다."라고 했다. 나의 쉬지 않는 명랑함이 일욕심으로 인한 똘기 또는 승부욕에 대한 독기로 보였던 것 같다. 반면 늘 명랑한 내가 불만족스러웠던 또 다른 상사는 "바보 아냐? 아님 좀 부족하거나"라고 했고, 또 다른 동료는 "그렇게 낙천적이면, 다른 사람들이 버거울 수 있어."라고 했다.
한국어 교사가 된 후에도 나의 명랑함은 지치지를 않는다. 어느 날은 한 학생이 말했다.
한국어 선생님은 돈을 많이 받나 봐요.
연휴 전에는 캠핑 계획을 말하고, 방학 후에는 즐거웠던 미술관 방문과 쇼핑 등을 말하니 그럴 수밖에. 여러 맛집과 쇼핑 경험, 휴일 나들이, 국내 여행지 등 한국 생활을 하나라도 더 말해주려던 내 노력들이, 마치 보기 좋은 SNS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제목에 '기쁜'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여기서도 명랑하다. '슬픈' 한국어 교육기는 몇 편 되지 않는다. 시종일관 기쁜 이야기를 쓰며 나는 나의 명랑함에 대해 다시 고민한다. 누군가는 내 글을 읽고 명랑함이 지나치다 느끼거나 한국어 교사의 그늘은 다루지 않아 비현실적이다 느끼지 않을까. 아니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상처받지 않을까. 그리고 한국어 교사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에게, 이 직업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남기지 않을까. 하지만 많은 글쓰기 교재에서 말하길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글은 재미없는 글이기 쉽고, 작가가 되겠다 함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안다. 진실하지 않은 글은 독자도 알아본다.
그렇다면 나에겐 진실인 내 글. <기쁜 한국어 교육기>를 읽고 누군가가 불편해 한다면, 내 글은 성공한 글인 건가... 알쏭달쏭.